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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크리스찬타임스]]></title>
		<link><![CDATA[www.ctimes.or.kr]]></link>
		<description><![CDATA[크리스찬타임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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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기독교강요(21) 칼빈의 삼위일체 제시(13-2)]]></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6&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기독교강요』 1권, 13장, 2. “하나님은 한 실체에 세 인격이신 삼위일체이시다. 삼위일체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동일한 믿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시(speciali nota)로서 우상(偶像)으로부터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선언하시며(revelatio ipsius Dei), 자신을 삼위(三位) 안에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묵상하도록 하셨다(in tribus persons cosiderandum proponat).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두뇌(nostro volitat)는 참된 하나님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정확히 하나님의 이름이 헛된 생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어떤 이는 삼중으로 된 하나님(triplicem Deum)을 공상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한 실체(實體)에 삼위로 분열되었다고(putet tribus personis nacerari simplicem Dei essentiam)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간단하고 명료한 정의(brevis et facilis definitio)를 찾아 모든 오류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해야 한다. “una substantia in tribus personis, tres personae in una substantia”는 발트의 문장인데 칼빈이 거부한 문장이었다. 발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사랑’으로 보는데, 칼빈은 ‘독생자, 성자’로 본다. 칼빈은 예수를 ‘성부와 동일본체’로, 발트는 ‘계시자’로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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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801:26]]></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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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54) 11권 25-26장. 피조물에 있는 삼위일체의 그림자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5&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11권 25장. 철학자들도 학문을 세 부분(물리학, 논리학, 윤리학)으로 나누었는데, 그들이 창안한 것이 아니고 발견한 수준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의 3분법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방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의 3분법은 하나님의 지식의 그림자에 의한 것으로 본다. 물리학은 ‘본성적’인 것으로 모든 사물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고, 논리학과 윤리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 이성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선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자들이 사물의 원인에 대해서 이성적인 인간에게 목표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 가지가 합해지는 것을 ‘향유(享有, 즐김)’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한 즐거움은 ‘현세적인 잠시의 즐거움’이 아닌 ‘영원한 대상을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잠시의 즐거움을, 돈을 거두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현세에서 거두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현세, ‘본성’은 원리에 관한 것, ‘논리’는 교육을 목표로, ‘윤리’는 실용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교사로 모시고,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내적 즐거움을 풍성하게 받아야 한다.   26장.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이 논제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자연 출생’에 ‘하나님의 형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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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618:4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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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디트리히 본회퍼의 일대기 “전율의 잔” The Cups of Trembling]]></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4&msection=6&ssection=17]]></link>
	 		<description><![CDATA[
	 		6월25일 ~ 7월5일까지 노량진 CTS  기독교 방송국 아트홀에서, CTS기독교TV(회장 감경철) 창사 20 주년과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25 주년을 기념하여, 탤런트기독신우회와 믿음선교단에서 디트로히트 본회퍼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그린 “전율의 잔”을 공연한다.&nbsp;&nbsp; ‘전율의 잔’은 극작가 엘리자베스 베리힐의 작품을 최종률 교수가 각색, 연출을 맡았다. 본회퍼 역에 정선일 그리고 최선자, 정영숙, 우상민, 이경영, 변은영, 김민경, 송승용 씨 등이 열연한다.&nbsp; 나치즘에 항거한 시대의 목사이며 천재였던 본회퍼의 생애를 그렸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해서, 당시 독일 교회나 천주교회는 침묵하거나 긍정했다. 양심적인 신학도들은 독일에서 피해서 스위스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는 베를린에서 나치즘에 항거했다. 독재에 항거한 독일의 양심이였던 본회퍼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마음을 인정하는 학도들이 꾸준히 신학을 탐구하고 정신을 연구하고 있다.&nbsp;&nbsp; 금번에 믿음의 탤런트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디트리히 본회퍼가 소개되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전율의 잔”은 몇 차례 공연한 연극이기도 하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 본회퍼에 대한 인식은 매우 미비하다.&nbsp;&nbsp;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침묵하고 동조한 과거가 있다. 그러나 또 신사참배에 항거한 순교자들이 있다. 본회퍼의 모습에서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의 고뇌와 거룩한 결단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믿음의 선각자들을 통해서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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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609:51]]></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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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우리말123]‘출애굽기’와 ‘출애급기’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3&msection=6&ssection=19]]></link>
	 		<description><![CDATA[
	 		오늘은&nbsp;신문에 난 기사를 함께 읽고자 합니다.경향신문에 난 기사로 '애급과 출애굽기'라는 제목입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032121125&amp;code=990100얼마 
전 독자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이집트의 음역어가 애급(埃及)인데 &lt;성경&gt; 창세기 다음 제2장에 나오는 ‘출애굽기’는 왜 
‘출애급기’로 표기하지 않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헬라어(그리스어)로 이집트를 아이귑토스라고 한다. 아이귑토스를 음역화한 게 
‘애급’이다. 불란서(프랑스), 이태리(이탈리아), 화란(네덜란드) 등은 널리 쓰이는 음역어다. 영국(英國)은 ‘잉글랜드’의 음역어 
‘영란(英蘭)’에서 온 말이다. 영(英)이 중국어 발음으로 ‘잉’이다. 음역어는 한자를 가지고 외국어의 음을 나타낸 말이다.표기상 
‘출애굽기’는 ‘출애급기’로 쓰는 게 맞다. 하지만 ‘애급’보다는 ‘애굽’으로 발음하는 게 쉬워 ‘급(及)’의 음이 ‘굽’으로 변한 것이다. 
‘초생’이 ‘초승’, ‘이생/저생’이 ‘이승/저승’, ‘금슬’이 ‘금실’로 변한 것처럼 한자말을 우리말로 적을 때 원래 소리가 변한 것이 더러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도 ‘출애굽기’의 ‘굽’의 음이 변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출애굽기’와 ‘출애급기’ 중 어느 것이 
맞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개인적으론 ‘이집트 탈출기’라고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요즘 한글세대뿐만 아니라 한문에 웬만한 관심이 없으면 
‘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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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520:12]]></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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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부실과 부패가 끊임없이 드러나는 합동 교단]]></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2&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합동 교단은 한국 최대 교단이다. 교단의 뉴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신문사도 교단 신문 외에 몇 개가 존재할 정도로 대형 교단이다. 장자 교단, 대형 교단의 위용만 있지, 한국 교계에서 영향력은 크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모습이 연일 뉴스에 보도 되고 있다. 멸망될 공룡 교단인지 거룩한 장자 교단인지 이제 자기 정체성을 명확하게 세워야 할 때가 왔다.&nbsp;모 신문사에서 합동 교단의 대표 교회인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의 목회활동비 유용에 대해서 게시했다. 사랑의 교회는 호불호가 나뉘는 교회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분쟁중에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도 담임목사의 재정 운용에 대한 불합리한 소식이 들리는 것에서 상태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부목사의 추행에 대한 소식이 잊혀지지도 않았다. 해당 노회에서 부목사에 대한 징계도 사회법의 징계를 감안한 징계를 내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사회법의 징계는 사회법의 징계이고, 교회법의 징계는 교회법의 징계다. 사회법의 징계보다 더 무거운 징계가 교회법의 징계다. 그런데 사회법에서 징계했기 때문에 이중처벌?의 징계를 피한다는 발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회법은 징계, 교회는 법이 없고 치유만 있는가?&nbsp;사랑의 교회 부목사는 그래도 노회의 심의를 거쳐서 부목사 시무 사임(사면도 아닌)을 받고, 치유를 하도록 결정했다. 그런데 전병욱 목사에 대해서는 더 요지경 속에 있다. 총회 밖에서 징계를 하도록 압력을 하고 있다.&nbsp;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총신대학교 김지찬 교수의 표절 논란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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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501:47]]></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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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동성애, 당신도 동의하십니까?(롬1:24-27)]]></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1&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얼마 전 프랑스의 언론인인 에릭 제무르라는 분이 ‘프랑스의 자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지금 프랑스는 이슬람이나 동성애 등의 문제로 자살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작이 68혁명이었다는 것입니다.&nbsp;68혁명은 1968년 3월 22일 낭테르대학에서 시작된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결국 노동자들까지 가세하여 전국을 마비시킨 대규모 운동이었어요. 그들은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정치적, 사회적, 성적(性的) 금기 등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깨뜨리고자 하는 도전과 저항운동을 했습니다.&nbsp;그래서 68혁명의 세대들은 아버지 세대의 지도적 권위를 부정하고, 기성세대의 전통적인 질서와 가치관을 거부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탈규범적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갔어요. 즉, 이슬람 등 이민자와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 자유, 환경, 페미니즘 등 비물질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 풍토를 만들어간 거예요.&nbsp;그런데 제무르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68혁명의 정신 기조가 바로 프랑스 몰락의 원인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거예요. 그는 한 이탈리아 신문 인터뷰에서 "프랑스가 500만 명이 넘는 이슬람 신자를 추방하지 않으면 내전에 빠질 것"이라고 충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학자 쥘리 파지라는 사람도 68혁명을 주도했던 자들의 삶을 추적 조사해 보니까 대부분 자살·약물중독 등에 빠지는 경우가 많더라는 거예요.&nbsp;그런데 68혁명으로 인한 또 하나의 중요한 병폐 현상이 바로 동성애 문제였습니다. 동성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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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422:33]]></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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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성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복음선포]]></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90&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nbsp;

&nbsp;

&nbsp;서철원박사(전,총신신대원장)
종교개혁은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정하였다. 이신칭의 교리만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들었고 만든다. 루터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시작한 교회이므로 이신칭의 교리에 전적으로 부착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이신칭의를 불변의 교리로 받지만 성화를 강조하는 자리로 진보하였다. 성화강조에서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성경적인 성화법은 제시하지 못하고 성화를 강조하였다. 단지 옛사람을 죽이면 새사람이 살아나고, 새사람을 살리면 옛사람이 죽는다고 칼빈이 가르쳤다. 이 가르침을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그대로 반복하였다. 그리하여 죤 오우언도 그대로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성화를 강조하여도 성화를 이루는 법 곧 옛사람을 죽이는 법 혹은 죄의 욕망을 억제하고 소산시키는 법은 말하지 못하였다.
칼빈도 이 부분에서는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성화의 필요성은 강조하면서 죄의 욕망 혹은 육의 욕망을 죽이는 법을 말해주지 못하였다. 종교개혁자들만이 아니라 고대교부들도 성화를 어떻게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였다.
한국장로교회에서도 시작단계에서는 성화가 강조되고 엄격하게 주장되어 범죄하면 합당한 권징을 받았다. 그래서 죄의 욕망으로 떨어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도 죄의 욕망으로 넘어가지 않는 법을 말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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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412:16]]></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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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발람의 꾀 (민25:1-18)]]></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9&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발람은 불의의 삯을 받기로 하고 발락의 요청에 응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에게서 한 별, 한 홀을 가지시고 오실 왕을 예언하여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할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발람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발람은 발락이 주기로 한 금, 은 보화를 받지 못한 것일까요? 그런데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발람이 결국 불의의 삯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달라고 하는 발락의 요청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보호와 은혜를 받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끊어질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꾀를 주고 떠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압의 여인들로 하여금 그녀들의 몸을 팔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알의 제사 앞에 나오도록 꾀한 것입니다. 이 발람의 꾀는 너무나 정확하게 발락이 요구하는 대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에 부합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발람의 꾀가 무엇이며,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무엇을 또한 계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nbsp;먼저 오늘 말씀에 보면 발람의 꾀라고 하는 말이 없습니다. 발람은 자신의 나라로 떠났고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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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313:56]]></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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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니케야 신경(325년)'를 그릇 제시에 대한 것에 대한 유감]]></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8&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고대교회의 4대 공회의는 325년 니케야 공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431년 에베소 공회의, 451년 칼케톤 공회의이다. 그 사이에 여러 회의들이 있지만 보편교회의 공회의라고는 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인정하는 397년 카르타고 공회의가 있고, 또 부당한 회의들도 있다. '보편교회'는 4개의 공회의 문서를 채택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4개의 공회의 문서를 채택하면 397년 카르타고 공회의의 정경 범위 확정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4개 공회의의 문서와 다른 공회의의 문서들이 있다. 종교개혁은 4개의 공회의의 문서와 다른 공회의 문서를 배격하는 교회 질서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 325년 니케야 신경으로 공개되어 있는 공회의 문서가 바르게 소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른 문서를 제시한다. 바른 문서를 제시하는 한국 신학자로는 서철원 박사의 [교리사](pp. 242-243)와 김광채 박사의 [고대교리사](pp. 312-315)가 있다. 여기에서는 서철원 박사의 한글 번역을 제시한다.(참고, 우크라이나&nbsp;고창원 목사 블러그에 &nbsp;서철원, 김광채 박사의 원문이 있다. http://gohchangwon.tistory.com/216)&nbsp;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조물주를 믿는다.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데, 그는 아버지게서 출생하신 독생자이다. 이는 아버지의 실체에서 나셨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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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312:4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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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김동수 교수의 방언에 대한 비판(3)단수로 표기된 ‘글롯사’(방언)는 거짓 방언이라고?]]></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7&msection=4&ssection=43]]></link>
	 		<description><![CDATA[
	 		주장: 바울은 ‘글롯사’(방언, 혀)의 복수형은 방언의 은사를, 단수형은 가짜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양자를 구별한다(이창모).&nbsp;반박: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사용해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해서 말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방언들”은 진짜 방언을, “방언”은 가짜 방언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바울이 독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게, 마치 암호화 하듯이 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김동수)&nbsp;“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 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는 김동수 교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에도 그 예가 없기 때문에 ‘그 예가 없는 어떤 설명은 참이 아니다’라고 하는 논리는, 김동수 교수가, 진리에 물을 탈 때 자주 쓰는 궤변에 불과하다. 자신의 아들을 죽임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동서고금 어떤 종교나 신화 그리고 어떤 문서에도 그 예가 없다. 따라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은 김동수 교수의 궤변대로라면 거짓이 되고 만다.&nbsp;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의 예는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 예가 없으며,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에도 그 예가 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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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300:44]]></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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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현대인을 위한 언약 신학』,Peter Golding, 박동근 역, 그나라, 2015년]]></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6&msection=2&ssection=53]]></link>
	 		<description><![CDATA[
	 		Peter Golding, 박동근 역, 『현대인을 위한 언약 신학』, 도서출판 그나라 펴냄, 2015년, 신국판 367쪽, 값 17,000원&nbsp;종교개혁에서 현재까지 개혁파 언약 신학의 전개를 명확하게 밝힌 명저.개혁신학은 언약신학이다. 피터 골딩은 연구하는 목사로서 ‘언약’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학위를 바탕으로 ‘개혁신학의 언약 사상사’를 정립하였다. 『현대인을 위한 언약 신학』은 쯔빙글리, 블링거, 칼빈에서 네델란드의 코케이우스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그리고 후로 전개한 언약사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언약’이란 단어가 성경에 등장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제시될 수 있는 것이지만, 종교개혁 당시 체계화되면서 개혁파의 전유적인 ‘언약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개혁파의 언약신학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눈다. 코케이우스는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 모세와 맺은 은혜언약, 그리스도와 맺은 새언약(p. 88)으로 구분하였다. 코케이우스가 ‘언약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구속언약,pactum salutis’의 모습은 없었다. 그리고 영국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 코케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피터 골딩은 영국의 언약 개념은 블링거 그리고 스코틀랜드 언약사상을 근거로 본다. 피터 골딩은 언약Covenant과 계약Contract을 구분하는 것을 주장하였다(p. 104). 그 외에도 협정, 조약 등 다양한 어휘를 제시하였다. 인간과 인간에 맺은 방식과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방식을 명료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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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6-0223:26]]></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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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롬13:11-14,  빛의 갑옷을 입자]]></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5&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사는 삶을 의미하며,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고,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혹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게 된다. 특별히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에베소서5:15)’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찾는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에베소서5:10)’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로마서12:2)’는 삶이다. 여기서‘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한 ‘긴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19:2)’고 명령하신 것을 지키기 위함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과는 다른 삶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행복과는 다른 행복..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6-0110:55]]></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온유와 거룩한 긴장]]></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4&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모세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12:3)’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은 ‘낮은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모세가 온유하다’는 말을 하나님은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수기12:7)’라고 말씀하시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된 종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모세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없어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민수기20:3-4)’라며 모세에게 불만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민수기12:20)’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20:12)’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잊고 자신의 혈기를 드러내며 자신의 방법을 따라 행동했을 것이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라 사람의 방식으로 산다. 어쩌면 자기의 유익을 따라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 사람들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6-0110:5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015년 12시, 6월]]></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3&msection=7&ssection=46]]></link>
	 		<description><![CDATA[
	 		&lt;김순철 목사, 화순서현교회&gt;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6-0109:2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기독교강요(20) 칼빈의 삼위일체 제시(1)]]></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2&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기독교강요』 1권 13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Unicam Dei essentiam ab ipsa creatione tradi in Scripturis, quae tres in se personas continet. THE UNITY OF THE DIVINE ESSENCE IN THREE PERSONS TAUGHT, IN SCRIPTURE,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In Scripture from the Creation Onward, We are Taught One Essence of God, Which Contains Three Persons.창조로부터 하나님의 본체는 한 분이시며, 성경에서는 삼위로 구성하심을 말씀한다. 기독교강요 1권 13장은 삼위일체 논의로써 전통적인 삼위일체 논의의 총체이다. 그래서 13장은 특별히 요약이 아닌 전문을 번역에 주해를 겸용하여 제시한다. 특별히 1-6절은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무한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본질(de immensa et spirituali Dei essintia)을 가르치는데 일반적 미혹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세속 속임수의 교묘한 이론을 반박하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 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Senec. Praef. lib. 1 Quaest. Nat.)라고 그럴 듯한 말을 하였다. 일반적인 생각은 신성(神性)이 세계의 모든 부분에 각각 내재한다고 상상한다. 그런데 하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3122:3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김동수 교수의 방언에 대한 비판(2)바울이 말한 방언이 방언기도가 아니라고?]]></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80&msection=4&ssection=43]]></link>
	 		<description><![CDATA[
	 		
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기도가 아니라고?&nbsp;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김동수)&nbsp;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는 것을 근거로 ‘방언은 방언기도가 맞다’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은 억지 주장이며, 만약 억지 주장이 아니라면 그가 과연 정상정인 신학자인가를 의심케 할 만큼 유치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전후문맥을 무시한 채, 또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이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어린아이 수준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고려한 바울의 진술임을 간과한 채 문자대로만 본문을 읽은 무지의 소치이기 때문이다(거짓 방언자들은 예외 없이 이 본문을 김 교수처럼 읽는다. 필자는 이들의 억지 주장이 일견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을 설명하는 성경 본문으로, 자신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억지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
위 본문에서 바울의 진의는 무엇일까? 겉보기 말대로 고린도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왕처럼 참여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23:1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한 별과 한 홀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민24:10-25)]]></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9&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예수님께서 모든 구약의 말씀이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을 요5:39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도 분명하게 예수님에 대하여 발람이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계속 배워야 합니다. 이 우주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천사마저도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배우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발람의 예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랍니다.&nbsp;&nbsp; 
먼저 발락은 자신의 형제인 이스라엘을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하였는데 계속해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손바닥을 치며 발람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신경질적으로 발락은 발람에게 그만두라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은 자신이 왜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말씀을 주시고 성령으로 자신을 사로잡아 예언을 하게 하므로 자신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발람의 이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방법 가운데 불신자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23:08]]></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엡5:15-21,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우리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8&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우리는 지난주에 ‘거기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일주일을 보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의 자리에 살아계심을 믿음으로 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거기 계시며 말씀하신다’는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너’로 인정해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성령 강림을 준비하는 기도회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일임을 나누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악함을 이야기하면서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것을 요구하면서‘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5:18)’고 말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했을 때 바울이 사용한 어법은 현재 수동태 명령형이다. 바울은 수동태(be filled with the Spirit)를 사용함으로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시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한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충만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한 것은 술 취한 사람들이 술의 지배를 받아 방탕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즉, 성령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은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23:0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7&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한국교회의 자화상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목사의 성추행과 관련하여 많은 언론매체를 통해 회자되는 일로 교회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이다.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과 관련된 음행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회와 교단자체에서 그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사랑의 교회 부목사의 성적 충동 장애로 인한 성추행 사건이 우리를 더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처럼 목사의 부정이나 죄악으로 인해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여전히 교회의 한 몸이라고 하는 교회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회에서 이렇게 음행으로 인해 죄를 범한 목사를 징계하지 않고 그냥 간과하고 있다는 것은 노회목사들의 자질 또한 의심이 된다. 그들이 목사의 죄를 알고도 징계하지 않는 변명가운데 하나는 목사도 사람이라고 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는 자기 자신을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살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것이다. 성도들의 죄는 보면서 정작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악은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일어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는 사변적인 해석과 번영신..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23:0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16세기의 위로와 21세기의 위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6&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나오기 까지는 팔츠 지역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Fridrich Ⅲ, The Pious, 1515-1576)의 역할은 컸다. 그는 팔츠지역에서 일어난 루터파와 칼빈파와의 성찬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개토론을 했고, 그 결과 그는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우르시우스에게 후손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요리문답을 작성하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었던 우르시우스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고, 신앙의 형태가 장로교인가 아니면 카돌릭인가 혹은 감리교인가는 그 땅을 지배하는 영주들이 결정했다. 영주의 신앙은 곧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신앙이었고, 혹 영주의 신앙과 다른 고백이나 다른 신앙적 형태를 따라간다면 삶의 많은 제약을 당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3세는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가난한 왕족으로 살았다고 한다. 영주들은 신앙의 차이를 이유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하에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만들어진 시대는 절대적인 가난과 함께 정치적이거나 신앙적인 갈등이 많은 시대였다. 그런 시대 속에서 우르시우스는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목표보다는 사람들의 삶에서 느끼고 경험되는 비참함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었다. 
하에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2문은 서론으로 참된 위로는 무엇이고..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23:0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김동수 교수의 방언 비판(1) 바울이 말한 방언이 외국어였다고?]]></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5&msection=4&ssection=43]]></link>
	 		<description><![CDATA[
	 		
아래는 2015. 2.10 “성경과의 만남, 신학과의 만남”에서 김동수 교수가 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한 비판의 글과 그에 대한 이창모 목사의 반론이다.&nbsp;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였다고?&nbsp;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말한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라는 어구가 똑 같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같은 어구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주석의 abc를 모르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같은 어구가 반듯이 같은 뜻이 아님은 같은 저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이 되기고 하고(요3:16), 교회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반대 세력이 되기도 한다(요16:19). 더구나 동일 저자가 아닌 경우에 같은 어구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뜻으로, 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김동수)&nbsp; 
(반론)
성경에서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일 수 있다는 김동수 교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혹 드물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어구가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일 경우보다는 같은 뜻, 같은 신학적 입장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김동수 교수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독자들에게..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22:5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언약은 자기 백성 삼으시려는 약정]]></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4&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nbsp;

&nbsp;서철원 박사(전 총신대 신대원장)
개혁교회는 언약사상을 체계화해서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신학의 요목으로 설정하고 있다. 17세기 언약사상이 체계화될 때 루터교회와 카돌릭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언약사상은 오직 개혁신학의 요체로 남게 되었다.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이 은혜언약을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은혜로 구원얻는 하나님의 섭리에 반해서 구약 백성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신약백성은 율법을 지키는 일 없이 그냥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 얻도록 은혜언약을 세우셨으니 참으로 은혜로 알고 감사하였다.
그러나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칼빈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서 공식화되었다. 칼빈은 언약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였지만, 언약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한 번도 밝히지 못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이 언약의 바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공식화하였다. 이 언약사상이 17세기 중반에 체계화되어 널리 퍼지고 개혁신학의 중심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 후 거의 소실되었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살아났다.
한국교회에서 은혜언약 사상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을 이루셨으니 믿기만 하면 은혜로 거저 구원받는다는 사상은 참 개혁신학으로 인정되었다. 언약체계는 한국백성들에게 열렬히 수납되었다. 선행과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라고 하는 가르침은 성경적 진리여서 열렬히 수납되었다.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600:5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핸폰 사진] <쉼 그리고 여유와 풍부>]]></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3&msection=7&ssection=48]]></link>
	 		<description><![CDATA[
	 		&lt;쉼 그리고 여유와 풍부&gt;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401:2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합동의 두날개에 대한 자세는 부적절]]></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2&msection=2&ssection=8]]></link>
	 		<description><![CDATA[
	 		



예장 합신 이대위가 지난 5월 18일에 진행한 김성곤 목사의 교회성장 프로그램 ‘두날개’의 이단성에 대한 공청회(5월 18일)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김성곤 목사가 소속한 예장 합동이 김성곤 목사를 감싸고 보호하려하므로 복음의 진리의 문제가 세력다툼과 영역싸움의 수준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우려가 일어나고 있다.
합신 이대위가 ‘두날개의 이단성에 관한 공청회’를 준비하자 김성곤 목사는 자신이 소속한 합동 교단의 서평양노회에다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다. 김성곤 목사의 풍성한 교회가 소속한 서평양노회의 노회장이 합신 이대위가 추진하는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 이단성에 대한 공청회를 중지시켜 달라는 내용의 진정문을 합동 총회의 대표에게 보냈다. 이러한 정황이 ‘두날개 이단성에 관한 공청회’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 합동 총회가 합신 총회에 보낸 공문서 속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진정인(김성곤 목사가 소속한 서평양노회 노회장)의 호소대로 아무런 합법적인 절차없이 개인의 신앙운동에 대해 문제 삼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는 ‘신앙양심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장로교회의 헌법 기본 원리에도 어긋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귀 총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본 교단 소속 김성곤 목사에 대한 조사를 즉각 중지해 주시기 바라며, 만약 어떤 문제가 있다면 김성곤 목사의 치리권이 있는 본 교단을 통해 처리해 주시길 정중히 요청드린다”



&nbsp;

&nbsp;

&nbsp;합동 총회가 합신 총회에 보낸 공문
합신 이대위가 두..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323:4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합동 교단에 대한 외부의 외침]]></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1&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총회장 백남선 목사)은 장자 교단의 위용을 갖음을 자부한다. 그런데 작금의 모습에서 합동 교단은 그 위상에 걸맞은 행동인지 의심이 간다. 첫째, 총회의 결정에 불응하는 총회의 회원들이 있다. 총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총회신학교인 총신대학교의 관계이다. 총회의 결정을 국가법에 의지해서 무시하는 행동이 가능한가? 교회법과 국가법의 위상에서 국가법이 상위법이 되어버린 교회의 권위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제 교회들도 분쟁에서 노회나 총회의 결정보다 국가법이 최종권위로 삼고 있다. 그런 곳에서&nbsp;교회, 노회, 총회의 권위를 들먹일 수 있겠는가?둘째, 전병욱 목사에 대한 총회 밖의 면직청원 운동이 있다. 목사의 임면권은 총회에 있지는 않다. 그런데 전병욱 목사 치리를 위해서 총회에 청원운동을 하고 있다. 명약하게 드러난 성범죄의 행태에 대해서 권징을 하지 않는 노회의 모습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노회와 총회에 대해서 총회 밖에서 청원운동을 하는 것은 더욱 황당스럽다. 외부의 압력에 대한 합동 총회의 자세에 대해서 귀추가 주목된다. 여전히 장자교단의 위상으로 버틸 것인가? 외부의 압력에 순응해서 치리를 할 것인가?셋째, 합신 교단은 교단에서&nbsp;실시한 두날개시스템에 대한 이단성 공청회에 대한 합동 총회의 제안을 무시하였다. 합동 측 소속의 목사를 합신 측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행동이 발생한 것이다. 합신 교단은 교단 안에서 두날개 시스템의 행태에 의해서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다. 그..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323:4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예그리나장애인복지센터 여수에 가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70&msection=5&ssection=13]]></link>
	 		<description><![CDATA[
	 		예그리나장애인복지센터(센터장 김용근)은 광주광역시에서 지원한 비영리단체 공익사업의 일환프로그램인 "장애인과 함께하는 문화체험을 위한 아름다운 동행"을 실시했다. 예그리나장애인복지센터는 장애인과 봉사자들이 함께 여수를 탐방했다. 5월의 싱그러운 여수 바다와 함께 참석한 모두는 행복한 시간들을 갖았다. 참석한 장애인들의 화사한 얼굴에서 의미있는 프로그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애인들에게 보다 많은 지원 방안을 통해서 활발한 사회활동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2323:1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김동수 교수의 방언 비판(1) 바울이 말한 방언이 외국어였다고?]]></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9&msection=4&ssection=43]]></link>
	 		<description><![CDATA[
	 		
아래는 2015. 2.10 “성경과의 만남, 신학과의 만남”에서 김동수 교수가 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한 비판의 글과 그에 대한 이창모 목사의 반론이다.&nbsp;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였다고?&nbsp;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말한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라는 어구가 똑 같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같은 어구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주석의 abc를 모르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같은 어구가 반듯이 같은 뜻이 아님은 같은 저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이 되기고 하고(요3:16), 교회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반대 세력이 되기도 한다(요16:19). 더구나 동일 저자가 아닌 경우에 같은 어구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뜻으로, 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김동수)
&nbsp; (반론)
성경에서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일 수 있다는 김동수 교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혹 드물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어구가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일 경우보다는 같은 뜻, 같은 신학적 입장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김동수 교수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독자들에게..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900:3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35주년 5.18 민주화운동]]></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8&msection=8&ssection=25]]></link>
	 		<description><![CDATA[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23:0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고전 12:1-3, 거기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7&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지난주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정결함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에 대하여‘샘이 깊은 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임을 나누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5:13)’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이 세상의 부정을 막고 세상을 정결하게 만드는 원천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샘이 깊은 물’로서 우리들임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며, 하나님의 실존을 삶에서 드러내게 되어있다. 이런 하나님 백성의 삶을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사람의 근본’으로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근본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실존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라브리’라는 공동체를 만든 프란시스 쉐퍼라는 분은‘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사람의 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침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책의 제목을‘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 제목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데, 그중 하나가‘거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마틴 부버의 ‘나와 너’에서 말하는 것 같이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너’의 자리에 계신다는 말이..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22:31]]></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에서 주는 위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6&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인데, 이 고백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부터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까지는 낮아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4:15)’라는 말같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비참함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비참함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이 우리의 죄 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40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낮아지심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적시키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과 같은 고통의 순간에서도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수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22:2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18일(월), 박태현 교수를 모시고 3회 호남개혁포럼 개최하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5&msection=1&ssection=3]]></link>
	 		<description><![CDATA[
	 		18일(월), 호남개혁포럼(대표 강조성 목사)는 박태현 교수(총신대 설교학, 바빙크 [개혁교의학] 역자)를 강사로 하여 3회 정기신학포럼을 개최했다. 박태현 교수는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과 "죠지 횟필드의를 중심으로 청교도&nbsp;설교"를 강연했다.헤르만 바빙크와 청교도 설교에&nbsp;대한 관심을 가진 목회자들이 참석하여 좋은 신학을 제공받는 기회가 되었다. 박 교수는 바빙크에 대해서 성경적인 신학자이고 인간적인 다양한 면을 소개해서 참석자들에게 좋은 시간이 되었다. 횟필드에 대해서 그리고 청교도에 대해서 설교에 대해서 강연했다. 설교자의 열정적인 연구와 기도를 강조하며,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제시했다.호남개혁포럼은 매월 정기 모임을 고경태 목사(주님의 교회, 한국성경연구원 원장)와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광주, 전남 그리고 개혁신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최용진 목사(갓플리징다문화 교회) 010-4799-0567로 연락하면 된다. 첫 모임은 6월 12일(금)에 갖는다.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21:20]]></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35주년 5.18에 부치는 詩]]></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4&msection=7&ssection=46]]></link>
	 		<description><![CDATA[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35주년 5.18에 부치는 詩-&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20:2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방언 그 불편한 진실], 이창모 목사 저, 밴드오브퓨리탄 출판사, 2014]]></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3&msection=2&ssection=53]]></link>
	 		<description><![CDATA[
	 		[방언 그 불편한 진실], 이창모 목사 저, 밴드오브퓨리탄 출판사, 2014, 20,000원.&nbsp; 이창모 목사는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는 목사이다. 이 목사는 자신이 경험했던 방언과 돌이키는 경험을 근거로 책을 집필하였다. &nbsp; 이 목사는 서문에서 2008년 옥성호 형제의 [방언,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에 대해서, 김동수 교수의 [방언, 하늘의 고귀한 언어]라는 저술과 2010년 [신약이 말하는 방언]의 저술을 출판했다.&nbsp; 이 목사는 일련의 과정에서 집필에 대한 의지를 갖고 연구에 매진하여 여러번의 자료 유실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원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완성된 원고가 출판되기까지 또 우여곡절을 겪었다. 출판사가 원고를 수정하는데, 저자의 의도와 다른 각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출판도 포기하고 있던 중 밴드오브퓨리탄 출판사와 연결되어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다. &nbsp; 출판은 독자를 위한 상품이지만 저자의 사상이기도 하다. 저자가 강력한 사상을 주장할 때에는 편집을 최소화하거나 생략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세련된 편집이 독자들 독서에 효율을 줄 수 있겠지만, 저자의 생생한 사상 전달의 열정을 감퇴시킬 것이다.&nbsp;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방언에 대한 비판 저술은 저자에게 긍정적인 일이 아니다. 모 광고 카피처럼 모든 사람이 YES를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nbsp;진리의 기둥의 터인 교회에서도 이러한 모양이라면 세상에서는 얼마나 심각할까 예..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20:1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동일한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 이해하기]]></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2&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창조 사역은 삼위께서 하신다. 그러나 만물이 제2위격으로 말미암음으로 창조주의 칭호는 제2위격 성자에게 돌려진다. 초대교회로 부터 최근까지 개혁주의에서는 그래 왔다. 요한 복음 1장 3절에 명시된다. 만물이 말씀을 말미암았다고...
최근에는 강조되지 않는 중요한 교리이다. Van Orrt 교수는 초대교회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알고 "예수"라하지 않고. "여호와"를 "아도나이"라고 부렀듯이 "하쉼"이라고 별도의 칭호로 불렀다는 것을 문헌을 통해 발견한다. 이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로 부터 창조주의 칭호는 제2위격에 돌려졌다. 그래서 창조주가 바로 구속주인 것이다.
이런 이해로 인해 구약에 나오는 여러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제2위격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다. 이런 이해속에서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이해가 완전하게 된다. 말씀이신 그분이 오신 것도 정확하게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제시한 그분이 온 것이 라는 이해가 아니라 말씀이신 그분이 오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이해함으로 나심의 이해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제2위격으로 영원한 아버지로 부터 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구약과 신약에 계셨고 그분이 오신 것이다. 이로인해 창조와 구속의 모든 것은 제2위격에 돌려진다. 이래야 구속 경륜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해된다.
이렇게 이해해야 구약은 성부 신약은 성자 지금은 성령 이런 아이러니한 해석이 없어..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819:15]]></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5.18 "님을 위한 행진곡"]]></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1&msection=8&ssection=23]]></link>
	 		<description><![CDATA[
	 		&nbsp;‘임을 위한 행진곡’은 5&#8228;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전남도청 진압 작전에서 희생된 윤상원 씨와 노동야학 활동가로서 유명을 달리한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극 ‘빛의 결혼식’ 중 마지막 합창곡으로 작곡되었다.&nbsp; 1980년 5.18 당시에는 민중가요가 등장하지 않아 시민들은 애국가를 부르면서 행진했었다. 대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중가요가 가리잡았고, 그 중에 가장 애절한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nbsp;&nbsp; 기독인으로 영혼결혼식이라는 것이 큰 아쉬움이 있지만, 민중의 애환을 표현하는 노래이고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 이전에 항상 불렀던 기념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기념식에서 불려져도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올해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빠진 기념식에 대대적인 참가 거부를 선언한 인사들이 많다. 이렇듯 5.18 기념식은 다양한 방법으로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nbsp;&nbsp;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 시민에게는 죽음과 동일한 것이다. 국가의 과도한 폭력에 의해 자위권을 행사하면서 항거했다. 무자비한 국가의 군인들에 의해 죽음으로 항거했고 무참히 짓밟혔다. 1980년 광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지방자치시대도 열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항거한 1919년 3.1운동에서 대한민국이 기원했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이다.&nbsp;&nbsp; 그러나 광주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낮..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623:3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53) 11권 24장. 삼위일체 진술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60&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11권 24장.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고 신실하게 전파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말씀(Verbum)을 출생하셨고, 그 지혜로 만물을 지으셨다. 독생자는 성부와 하나이시고 영원하시고 차이가 없이 최고선이시다(unigenitum Filium, unus unum, aeternus coaeternum, summe bonus aequaliter bonum).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시고, 동일본체이시고 동일하게 영원하시다(Spiritus sanctus simul et Patris et Filii sit Spiritus et ipse consubstantialis et coaeternus ambobus). 모든 삼위들이 각각 인격의 특징을 갖으시며 불리할 수 없는 신성으로 한 하나님이시다(hoc totum et trinitas sit propter proprietatem personarum et unus Deus propter inseparabilem diuinitatem). 한 분의 전능자이시지만 각각 분리할 수 없는 전능자이시다(unus Omnipotens propter inseparabilem omnipotentiam; ita tamen). 그리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세 분 하나님이 아니시고 전능한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해야 한다(sed unus Deus omnipotens). 삼위일체는 불가분의 세 위격이 한 본체를 이루심이고, 이것이 선포되어야 한다(tanta ibi est in tribus inseparabil..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622:5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18일(월), 합신 교단, 두날개 이단성 공청회 개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9&msection=1&ssection=3]]></link>
	 		<description><![CDATA[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619:1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아담과 이브의 혈액형은?(It's in your blood)]]></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8&msection=10&ssection=31]]></link>
	 		<description><![CDATA[
	 		[창조과학회 자료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11]질문 : 만약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라면,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혈액형을 가져야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4가지의 혈액형(A형, B형, AB형, O형)을 가질 수 있는가?답 : 사람에게는 ABO 혈액형을 조절하는 하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A, B, O의 3개의 대립유전자(alleles)가 있다. 유전자는 항상 한 쌍(한 쪽 부모에게서 하나씩)의 대립유전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두 개의 대립유전자가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라도 가능한 유전적 구성은 AA, BB, AB, AO, BO, OO 로서 존재한다.O 대립유전자는 A 또는 B에 비해 열성(recessive)이다. 즉 A 또는 B 대립유전자의 존재하에서 혈액형은 A 또는 B 대립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AO의 사람은 A형 혈액을, BO의 사람은 B형 혈액을, 그러나 OO의 사람은 O형 혈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O형 혈액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피를 줄 수 있는 공여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피는 A 또는 B 단백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A, B 또는 AB 형의 사람들에게 피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A형 혈액이 B형 혈액을 가진 사람에게 수혈되었을 때, 알레르기 반응은 그 수혈자를 죽음으로 초래할 수도 있다.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모든 대립유전자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A, B, O 대립유전자들을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609:3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 Epistola ad Diognetum]]></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7&msection=10&ssection=32]]></link>
	 		<description><![CDATA[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언어와 사회 제도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하여 거주하지도 않고, 자기들만의 언어를 쓰지도 않았으며, 자기들만의 생활 방식을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나 야만인들의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의복과 음식과 기타 생활에서 지역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놀랍고 역설적인 모습을 생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살면서도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시민의 의무는 다하면서도, 외국인으로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생소한 나라는 고향과 같았고, 모든 고향은 외국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했습니다. 자녀도 양육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녀를 버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식탁은 공유했지만 아내는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지니고 살지만 육체를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땅에 살지만 천국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현재 법을 준수하면서 법을 능가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데도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무명의 사람들인데도 정죄를 당합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는 데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난하면서도 많을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부족하지만 모든 것에서 풍부합니다. 그들은 비난을 받지만 그 비난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들은 중상모략을 당하지만 의롭습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으면서도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합니다. 그들은 조롱을 당하면서도 조롱하는 자를 존경을 합니다...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608:51]]></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복음주의의 홍수와 한계]]></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6&msection=4&ssection=43]]></link>
	 		<description><![CDATA[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주의(Evangelism)가 지배적이다.&nbsp;확실히 복음주의는 비성경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nbsp;복음주의는 시대적 특성을 강조하고 문화와 그 조류에 편승한다.&nbsp;특히 과거의 것보다 현실에 주안점을 둔다.&nbsp;개혁주의 진영에서 종교개혁시대의 신조와 신앙고백서들을 거론하면 그들은 낡아빠진 고문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황당해 한다.&nbsp;옛날의 문서들이 오늘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되묻는다.&nbsp;어떤 이는&nbsp;‘오직 성경’만이 신조요 신앙고백서라고 소리친다.&nbsp;아이러니한 것은 대개 이런 사람들은 신조와 신앙고백서들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nbsp;이런 부류들이 한 발 더 나아가면 기독교강요를 읽어보지도 않고 칼빈을 공격하기 일쑤다.&nbsp;심지어 칼빈을 살인자라고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자들도 익명으로 존재한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같은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면서 종교개혁의 정신과 전통과 가치들을 상실했다.&nbsp;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비 진리를 거부하고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 안에서 가장 성경적인 칼빈주의의 길을 버리고 가장 현실에 부합하고 유익하다고 여기는 실용주의(pragmatism)적 노선을 택한 기독교 안의 거대한 세력이다.&nbsp;실용주의는 취사선택을 하는 사상이다.&nbsp;이것은 모든 효율과 유익의 기준을 인간으로 삼는다.&nbsp;인본주의(humanism)의 한 형태이다.&nbsp;이들의 전제는 오직 한 가지, ‘무엇이 인간에게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519:3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방언"에 대한 격돌, 노우호 목사 vs 김동수 교수]]></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5&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한국교회에서 "방언"에 대해서 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성경통독활동을 해온 노우호 목사(에스라하우스 원장)의 [방언을 검증하자]에서 방언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면서 촉발했다. 이에 대해서 평택대 김동수 교수는 [방언, 성령의 은사]로 방언의 유용론을 제시하였고, 김동찬 목사는 [위로와 회복의 방언]으로 방언을 적극 옹호했다.&nbsp;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80인터넷 신문 "바른믿음"에서는 이창모 목사가 김동수 교수의 견해를 전면 반박하며 방언에 대해서 부정했다. 이창모 목사는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출판하여 성경에서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nbsp;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47 이창모 목사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에 무지가 있다고 기고했다.(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43)&nbsp;오순절주의와 신사도주의 시대에 방언에 대한 논쟁은 수 십년간 "방언에 대해서" 밑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방언에 대해서 많은 연구 논문들이 있으니 좋은 검토로 바른 판단이 필요하다.&nbsp;방언은 '신자의 체험'에 어디까지 정당성을 줄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다. 방언은 교회 안에서 신자가 갖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유의 체험은 아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에서 동일한 체험과 현상이 발생할 때, 그것이 기독교적이라는 것을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509:2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이단이 정통교회 안에는 없을까요?]]></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4&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nbsp;

박형택 목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연구소장)
요즈음은 교회의 분쟁과 갈등문제로 상담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목회자가 있고, 목회자로 인한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며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8-90%입니다.&nbsp;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단이란 교회 바깥에 있는 집단이나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경험하는 사례들로 미루어 판단할 때, 교회안에 많은 이단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정통이라고 말해지는 교회(교단)의 목회자들 중에서 이단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정통교회'(정통교단)이라고 알려진 곳에 소속한 목회자라도 성도들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인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지 않고 이용의 대상으로 삼아 목회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거나, 목회자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도 이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목회자의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요 섬김의 대상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는 성도들을 주님의 양으로 알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양육할까? 어떻게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줄까? 어떻게 낙심한 자를 격려하며 슬픈 자를 위로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할까? 생각하며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헌신하며 복음으로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nbsp;
반대로 이단적인 행위를 하는 목회자는 어떻게 성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하게 할..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411:35]]></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예정은 결국 복음을 믿어 구원받게 됨을 뜻해]]></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3&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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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박사(전 총신신대원장)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하신다. 하나님 홀로 창조사역을 하셨다.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작정대로 모든 창조를 하나님 단독으로 이루셨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천사들로 물질세계를 만드셨다는 이론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다.
또 하나님은 구원사역도 홀로 이루셨다. 하나님은 첫 인류의 범죄 당시부터 구원 작정을 알리셨다. 그리고 그 작정대로 인류를 회복하여 다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객관적인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객관적인 구원만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적용하여 실제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도 주권적으로 하신다. 사람이 자격을 갖추므로 사람이 구원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범죄한 인간들은 결코 구원에 합당한 자격을 갖출 수가 없다. 아무리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여도 그리고 참회를 많이 하여도 구원을 내 것으로 삼을 자격을 갖출 수가 없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구원을 거저 주신다. 은혜의 주권성의 강조가 개혁신학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은혜의 주권성의 강조는 하나님의 예정 곧 선택교리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칼빈의 가르침은 타락전 선택설로 이해될 부분이 많다. 죄와 무관하게 사람은 선택되었고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은 구원에 이른다. 이런..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411:3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택함 받은 자들이 아름다운 이유(민23:27-24:9)]]></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2&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돈 때문에 발락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발람은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연속 두 번이나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의 말씀을 들은 발락은 또 다시 선지자 발람을 다른 장소로 옮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게 하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 저주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nbsp;지금 모압왕 발락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신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발람의 입에서 그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발람과 발락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의 입에서 저주하는 말을 들으면 되는 것이고, 발람은 자신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 계시의 말씀을 주시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에 이미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멸망시키려고 한다고 하는 것에 불안과 초조를 느끼는 발락왕의 심정은 빨리 이스라엘을 패망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발람은 그저 자신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면 되는데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심정은 누구보다도 짜증이 나는 것이 분명합니다.&nbsp;민23:26절의 말씀은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314:3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요7:37-39, 샘이 깊은 물]]></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1&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의 원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에서 살게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삶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11:36)’라는 말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23:1)’라는 고백으로 드러냈고,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이해(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임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한복음7:38)’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장막절 행사 가운데 실로암 샘에서 금 그릇에 물을 길어 성전 앞에 서서 바위에 물을 붓는 상징적인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는 도중에 반석을 깨서 물을 내시기도 하시고, 또 필요한 것들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회상하며 축하했었다. 예수님은 이런 상징적인 행위에 익숙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109:0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사망의 공포를 위로하신 예수님]]></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50&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인간이 비참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삶의 유한함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 땅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가운데 답답함을 느낀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런 인간의 유한함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삶이 ‘헛되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사람에게 있는 유한함은 죽음으로 상징화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린도전서15:14-17)’라고 말함으로 죽음 그 이후의 문제를 언급한다. 결국 사망이 쏘는 것은 죄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사망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람이 살면서 삶 이후에 대한 문제 앞에서 고통당하고 힘들어할 수밖에 없고, 인간이 갖고 있는 유한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위로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즉, 유한한 삶에서 느낄 수 밖에 없는..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109:00]]></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기독교강요(19) 성경은 우상을 배격한다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9&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우상(偶像, idols)과 화상(畵像, image or picture)은 성경이 배격(排擊)한다. 선지자는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神)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신(神)에 대한 개념은 어리석은 허구(dull fiction, insipidum esse figmentum)에 불과하다고 단언하였다. idos, idolon, similans, simile, speciatum, speciosum, spectaculum, fictio, figmentum, fictum 더욱이 물질로 신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생각은 인간의 무모하고 부패됨을 보여준다. 우상은 인간의 창안물이다.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일시적인 존재인 것을 아는 것에서, 금속으로 만들 물질을 신(神)으로 대치한다. 신을 만드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이방인(Horace)의 시(詩)에서 나무 조각으로 신을 만든다고 조롱하였다. 정직한 이성은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인간의 무지(無知)를 책망하는 우상 숭배는 배격해야 한다(사 44:12-17).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사 40:21). 우상은 무한하시며 불가해하신 하나님을 몇 센티미터(Cm)도 안 되는 크기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은 본성 질서(naturae ordini)에 대해서 적대적인 자세가 인간 본성임을 증명한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미신(迷信, superstitiones)으로 말씀하는 것을 명심해..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1108:3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52) 11권 22-23장. 오리게네스의 오류에 대한 제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8&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11권 22장. 선한 하나님의 창조에 악한 현상이 있는 것. 세계의 기원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다. 지금을 참담한 상황으로 놓고 해결방법을 추구하면서 세계 기원을 찾는다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창조에서 인간이 독이라고 규정한 것도 바르게 사용하면 좋은 약이 되고,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무질서하고 부적절하면 해롭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divina providentia)를 얄팍하게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본성은 악한 것은 아니며, 악이라는 명사는 선의 결핍(privatio boni, the want of good)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cum omnino natura nulla sit malum nomenque hoc non sit nisi priuationis boni). 
지상 사물이나 천상 사물, 가시적 사물이나 비가시적인 사물들은 동등하지 않다(hoc inaequalia). 피조물은 평등(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이 그 위대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신 하나님 자체를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선하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미(美, beauti)를 지체의 균형과 비례로 제시하였다(parilitate ac dimensione membrorum, proportion and arrangement of the member).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서 악이 번성하는 것은 풀지 못할 문제이다. 마니교는 이 땅에 악한 신과 양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922:1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목사의 性 문제 밑바닥에 이르렀나?]]></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7&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한 주간 두 목사의 파탄된 성의 모습이 한국 뉴스를 강타한다. 대형교회의 목사들이기에 충격이 더 하다. 뉴스에서는 구만명의 대형교회 목사, 교회에서 여성 교육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전병욱 목사는 이제 교회만의 이름이 아닌 모두에게 알려진 이름이 되어 버렸다.성 범죄의 주요 집단 중에 '성직자'가 포함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고든 맥도날드 목사도 성적 범죄를 고백하고 사퇴했다. 그런데 그 습관은 다시 살아났다.성 범죄는 치료가 매우 어려운 정신병으로 볼 수 있다. 중독이 되면 치료가 되었다고 해도 다시 재발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번 지하철 몰카 사건에 대한 기사에서 당사자는 성적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더 부끄럽고 충격적인 고백이라 생각한다. 사건 발생을 약물을 복용하지 않아서 발생한 우발적인 상황으로 전개하는 것은 '목사'다운 자세가 아니다. 목사라면 어떤 벌도 달게 받을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치료되기 어려운 것이다.&nbsp;성직자에게 많은 성적 범죄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사역 환경이 이성과 자연스러운 친밀도에 있다. 목사는 자연스럽게 신앙상담과 생활상담을 하게 되며, 해결책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인도자로서 내담자의 의지가 된다. 이러한 의지의 대상인 목사가 연약할 때에는 '사역과 성의 경계'를 착각하게 된다. 성직자의 성 범죄의 원인은 훈련되지 않은 상태의 사역자의 자질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자를 대할 때 어머니 혹은 온전히 깨끗..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911:2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원로 강단]신32:1-12,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6&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모세가 애굽을 나와 광야&nbsp;40년을 지나 가나안을 바라볼 때&nbsp;120세가 되었습니다.결과적으로 생애 마지막 날에 믿음의 조상들(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언약했던 축복의 땅&nbsp; 가나안을 바라보며 선포했던 말씀입니다.&nbsp;1.&nbsp;하나님이&nbsp;자기의 눈동자&nbsp;같이 지키셨습니다광야는 위태로운 일이 많고,&nbsp;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nbsp;하나님이 동행하시니 때마다 일마다&nbsp;기적奇蹟의 현장이었습니다.&nbsp;&nbsp;하나님이&nbsp;‘언제나’&nbsp;동행하며 보호하시고 먹이지 않았다면 진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nbsp;&nbsp;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입니다.&nbsp;&nbsp;이 광야의 삶이 그 후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nbsp;모세는 지난날을 생각하며&nbsp;‘비 같고,&nbsp;이슬 같고 단비 같은’&nbsp;교훈을 들으라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nbsp;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했습니다.(신&nbsp;32:10)&nbsp;애굽에서 불러낸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삶을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nbsp;그 과정은 혹독했습니다.&nbsp;불순종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nbsp;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함 같이 미래를 위한 믿음의 훈련이었습니다.(32:11)돌이켜보니,&nbsp;홍해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nbsp;전쟁에서(아말렉)&nbsp;이기게 했습니다.&nbsp..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910:15]]></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새관점학파에 대한 이해(3) 새관점을 비평하는 김병훈 교수의 논문]]></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5&msection=10&ssection=30]]></link>
	 		<description><![CDATA[
	 		김병훈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는 새관점 학파에 반대하는 주요한 학자이다. 김 교수는 "율법주의, 언약적 율법주의, 은혜언약: 바울의 새 관점들의 신학적 소재?"[한국개혁신학] 28호(2010년), 147-191.에 논문이 기재되어 있다. 김 교수는 샌더스가 주장한 '1세기 유대교 이해'를 거부하기 때문에 새관점 학파의 전체 주장도 동일하게 거부한다. 새관점 학파의 시작은 1세기 유대교의 상태이다. 혹자들은 샌더스의 주장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파격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신약학계나 신학계가 샌더스의 이해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Covenantal Nomism는 '언약적 신율주의' 혹은 '언약적 율법주의'(김병훈, 최갑종, 송영목, 조병수)로 번역하고 있다. 율법주의는 legalism이 있기 때문에 nomism는 다른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샌더스가 legalism이란 단어에서 nomism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하는 legalism과 구분을 두기 위함으로 보인다.)I. 들어가는 말(p. 148)&nbsp; &nbsp;새관점에서는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에서 읽어왔던 바울의 성경해석이 바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해서 샌더스, 던, 라이트 등으로 노력으로 신약학계를 망라했다. 새관점은 신약 해석을 유대주의와 연속적 맥락에서 이해하며 본문 주석으로 제시하고 있다. 새관점 진영에서도 사소한 차이는 있는데, 통일된 범주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종교개혁신..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901:5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김동수는 거짓방언 위해 성경을 짜집어]]></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4&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nbsp;

&nbsp;김동수 목사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옹앙거리는 소리현상을 방언이라고 옹호하였다.&nbsp;
“바울과 누가가 방언에 대해서 말할 때 공통점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행 2:4; 고전 12:7)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배우지 않은 것이었기에 이것이 외국어이든, 실제 언어가 아니든 자신은 그 말의 뜻을 모르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어서 외국어를 더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부르는 것을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피아노를 잘 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하는 은사와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여기에 예시로 나와 있는 9가지는 모두 성령의 능력이 일시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현시되는 것이다(고전 12:8-10).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만 인정하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현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김동수)
오늘 날의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또는 영음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방언을(고전14:18) 바울의 단순한 외국어 실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김동수 교수는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811:51]]></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제10회 입양의 날(5.11)]]></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3&msection=8&ssection=25]]></link>
	 		<description><![CDATA[
	 		보건복지부(장관 문형표)는 5월 9일(토) 오후 1시 30분부터 과천시 시민회관에서 입양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한다.&nbsp;올해로 열 돌을 맞은 ‘입양의 날’은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로 “가정의 달 5월에 한 가정(1)이 한 아이(1)를 입양하여 가정을 이룬다”는 의미를 갖는다.&nbsp;2014년 입양규모는 총 1,172명으로 국내 637명(54.4%), 국외 535명(45.6%)이다. 2013년에 비해서는 국내입양은 조금 감소하고, 해외입양은 증가한 것이나,  입양 신청* 기준으로 보면 1,134명(국내 729명, 국외 405명)으로 국내·국외 모두 감소하였다. 2013년 대비&nbsp;2014년 국외입양 허가가 증가한 것은 법원의 국외입양허가 절차가 ’13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되어, ’13년에 허가신청한 417건 중 181건(43%)이 2014년으로 이월 허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nbsp;보건복지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입양에 대한 정보와 캠페인을 전개하여 건전한 입양문화를 마련하려고 한다.&nbsp; (단위 : 명)구분계2005년 이전200620072008200920102011201220132014계244,543224,7523,2312,6522,5562,4392,4752,4641,8809221,172국내78,405(32.1%)67,607(30.1%)1,332(41.2%)1,388(52.3%)1,306(51.1%)1,314(53.9%)1,462(59.1%)1,548(62.8%)1,125(59.8%)686(74.4%)637(5..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811:11]]></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새관점학파에 대한 이해(2)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권연경-]]></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2&msection=10&ssection=30]]></link>
	 		<description><![CDATA[
	 		권연경 교수(안양대학교, 신약신학)의 "옛관점과 새관점의 충돌", [한국개혁신학] 28호(2010년), 104-146의 논문을 요약하면서 정리한다.I. 들어가는 말&nbsp; &nbsp;권연경 교수는 바울신학계의 화두를 '새 관점(NPP)'으로 제시한다. 새관점은 종교개혁의 핵심적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개혁신학계에서 평가해서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106).II. 새관점의 발흥1. E. P. Sanders와 초기 유대교&nbsp; &nbsp;새관점의 시작은 1977년 E. P. 샌더스(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의 등장에서 
비롯하였다. 유대교가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은혜종교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언약백성의 신분을 회득하려는(getting in) 공로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staying in) 노력했다는 것이다(107). 이러한 유대 종교의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샌더스는 불렀다.&nbsp;&nbsp;샌더스의 주장을 신학학계가 적극 수용하였다(J. Dunn). 반대 의견도 있다(D. A. Carson, Thielmen). 이들은 유대교의 다양성을 과소평가하고 율법주의 경향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gt; 권 교수의 글로 본다면 새관점을 반대하는 진영도 주장을 인정하면서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학문적 주장을 거부할 명분은 없다. 학문과..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701:1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기독교강요(18) 성경은 우상을 배격한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1&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기독교강요』 1권 11장의 제목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경건이고, 우상을 세우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서방 기독교는 종교개혁으로 신교와 구교로 나뉜다. 루터와 칼빈은 중세 로마 교회의 행태를 미신적인 행태로 판단하고 개혁하였다. 그런데 로마 교회(교황주의)는 구습을 더욱 체계화한 반종교개혁을 하였다(트렌트 회의, 1545-1563). 그런데 20세기 제 2 바티칸 회의(1962-1965)에서는 신교의 카알 발트 신학을 채용한 카알 라아너의 신학 전개를 확립하였다. 현대 로마 교회(천주교)는 전통적인 예수 믿음과 성육신 이해 방식을 완전히 현대화하였다. 라아너는 신의 자기 통보를 성육신으로 이해하였다(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189). 정통의 성육신 교리를 신화로 취급하였다(FCF, 226).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인정하며 열린 신학을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로마 교회는 중세 미신적인 행동을 더욱 강하게 확립하였고, 결국 모든 미신 종교까지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공식 교리로 채택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상’을 성경대로 철저하게 배격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Verum ut Scriptura) 인간의 우둔한 이해력을 감안(勘案)하여(accommodation),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려고 할 때 하나님과 우상을 대조시켰다. 이러한 방법은 철학자들의 재치와 교묘한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행동이 공허하며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721:5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갈음, 가름, 가늠]]></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40&msection=6&ssection=19]]></link>
	 		<description><![CDATA[
	 		'갈음'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대신함"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보낸 편지로 갈음합니다처럼 
씁니다.'가름'은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는 일."로 차림새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름이 되지 않는다처럼 
씁니다.'가늠'은 "사물을 어림잡아 헤아림."이라는 뜻으로 그 건물의 높이가 가늠이 안 된다처럼 씁니다.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710:4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군산 오식도외국인지원센터, 네팔 돕기 성금모금]]></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9&msection=1&ssection=9]]></link>
	 		<description><![CDATA[
	 		군산 오식도외국인지원센터(김경태 목사)는 5월 5일 어린이날에 군산 은파유원지 물빛다리와 롯대마트 앞에서 네팔 돕기 성금모금을 전개했다. 오식도외국인지원센터는 군산산업단지에서 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 취업 연결, 직업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네팔인들이 모인 외국인지원센터이기도 하다. 그런데 금번 네팔 지진으로 휴일에 네팔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 모금활동을 전개한 것이다.&nbsp; 네팔출신 외국인 근로자 24명은 프랑카드에 지진피해로 고통받는 네팔을 도웁시다(PRAY FOR NEPAL)란 글귀와 사진을 삽입하여 시민들에게 지진 피해의 현실을 알렸다. 네팔 사람들의 도움의 모습을 본 어린이날 행락객들은 자녀의 손으로 구호금을 전달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nbsp;  네팔 지진은 80년 만에 온 강진으로 7,000명이 넘은 사망자와 수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잔해를 정리하면서 사상자들은 증가하고 있다. 김 목사는 금번 지진에서 오식도외국인지원센터의 가족들에게는 사상자가 없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고 감사했다. 그리고 네팔 근로자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했다고 한다.&nbsp;  그리고 모금 활동을 제안한 김 목사에게 왜 한국 사람들이 네팔을 돕겠냐고 반신반의하며 모금함을 갖고 나갔는데, 뜻밖에 좋은 호응으로 한국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에 크게 감격했다. 김 목사는 꾸준히 모인 성금을 네팔에 전달하며, 또 네팔 대사관을 통해서도 전달하는 체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네팔을 위한 후원과 성금은 오식도외국인지원센터..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701:28]]></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하나님을 대적할 자가 없다(민23:13-26)]]></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8&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모압 왕 발락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다시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제는 장소를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저주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13절 말씀의 해석이 그렇게 잘 번역된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발락은 발람에게 그대가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의 전부를 보지 못하고 끝부분만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전부 볼 수 있는 곳에서 보고 다시 저주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nbsp;발락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여 더 이상 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할 자들이 없다는 것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발락이 이방인이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락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 발람선지자를 통해 축복하여 주신 그 말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주의 말이 선포되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의 생각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신들을 섬기고 그 신들의 마음까지 변경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 정성을 보여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찾는 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발락은 여호와 하나님이 변할 수 있는 분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회전하는 그..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700:58]]></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신8:2-6,  하나님만을 보게하는 훈련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7&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같이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진을 치고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멈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멈추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하며, 삶의 일반적인 원리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거나 멈추는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이고 그 바탕을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로마서11:36)’라는 말로 이야기한다. 즉, 바울의 이 말은 삶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주님께 있고,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삶의 문제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삶을 살자는 권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린도전서10:31)’해야 한다. 이것은 왕국백성으로서의 삶의 원리이고, 왕국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현대적으로 말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난 주에 이야기한 구름과 불기둥 모양의 하나님의 영광은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인이다. 즉, 사람들은 구름을 따라 움직이고, 구름을 따라 정지했고, 이스라엘 사람들 외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610:5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유일한 위로자를 의지하라]]></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6&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비참함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원리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번에서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것임을 아는 데 있다고 말하는 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는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나를 풀어주시며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린도전서6:19-20)’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고린도전서4:3-4)’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혈통이나 육정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된 우리는 살면서 혹은 죽을 때에라도 유일한 위안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에서는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라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우리를 위해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하여 사도신경은 첫째로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말함으로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다윗의 후손..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610:5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이팝나무'~ '입하나무']]></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5&msection=6&ssection=19]]></link>
	 		<description><![CDATA[
	 		오늘이 여름으로 접어든다는 입하입니다.오늘은 '이팝나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요즘나무에 하얀 쌀밥을 얹어놓은 듯한 멋진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바로 이팝나무 꽃입니다.이팝나무 꽃은&nbsp;꽃 모양이 사발에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은 듯하다고 해서 '이밥나무'라고 했고,그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이팝나무'라고 합니다.('이밥'은 "입쌀로 지은 밥"이고, 쌀밥이나 흰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또 다른 뿌리는입하 무렵에 그 꽃이 핀다고 해서 '입하나무'인데, 그 이름이 부르기 쉽게 바뀌어 '이팝나무'로 되었다고도 합니다.제가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이팝나무 사진이 멋지게 나온 사이트가 있어 잇습니다.http://blog.daum.net/39kkkiok/16153357고맙습니다.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610:5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두날개는 사이비 방언 발전소였어]]></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4&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이단에게서 유래한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이 기독교를 유린하는 시대를 맞았으나 우리는 결코 기독교의 참 방언의 은사를 가벼이 여기거나 부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방언의 은사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도구였던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절하는 완고한 유대인들의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음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로 말씀하시는 방언의 은사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였다. 하나님이 사람의 말로 말씀하시는 방언의 은사와 그것을 통역하는 은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풍성하게 설명되었다.&nbsp;
‘우랄라라 우데떼떼 우닷따따 우랏싸사’
그러나 원수 마귀는 이렇게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교묘한 허구를 퍼뜨렸다. 이제는 이런 거짓된 방언에 물든 사람이 너무 많아 기독교를 이전으로 되돌리는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런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혜의 증거라며 추앙하는 구약의 산당과 같은 교회들이 이미 ‘정통교회’로 자리를 잡았다.&nbsp;구약의 바알 신전과 같이 지금&nbsp;그들의 위세가 거대해졌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순결한 신앙이 더 외롭고 미약해 보인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진리는 흔들림이 없다. 마귀의 거짓 물결과 파도는 언제나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이 잠시라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거짓 방언에 물든 사람이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5-0608:31]]></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지속되는 성도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3&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nbsp;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로마로 호송을 당하던 바울 사도가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난파를 당하게 되고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하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nbsp;바다에서 막 올라 온 바울의 일행들을 위해서 마침 비가 오고 일기가 추워지자 원주민들은 따뜻하게 불을 피워 주었는데 바울 사도가 장작더미를 불에 던져 넣다가 그만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28 : 3)
장작더미를 불 속에 던져 넣자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서 순식간에 사도의 손을 물어 버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nbsp;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그 모습을 지켜본 원주민들은 ‘이 사람은 살인자가 틀림 없다’ 라고 말하며 사도에게 일어난 일을 심상치 않게 여겼다.&nbsp;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바다에서는 간신히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이렇게 독사에게 물려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흔히 일어날 수 없는 불행스러운 일들이 바울 사도에게는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을 성경은 톱아보며 기록하고 있다.&nbsp;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게 된 일도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에 한 번 당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뒤이어 곧 바로 독사에 물리는 또 한번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심히 불길한 일들을 사도는 연이어 겪게 된 것이다.&nbsp;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바울은 회심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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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5-0608:1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51) 11권 18-21장. 선하신 하나님, 선한 창조]]></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2&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11권 18장. 하나님께서 악(惡)을 허용하셨다면 더 유익한 방안도 마련하셨을 것이다. 대구법(對句法, antitheses)은 문장의 가장 아름다운 묘사 방법 중 하나이다. 고린도후서 6:7-10에서 사도 바울이 탁월하게 이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대조에서 반대편을 더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질서를 갖고 있다.   19장. 하나님은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호한 것이 유익한 것은 여러 해석이 나타나는 것과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모호한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는 보다 명료한 다른 구절의 해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모호한 구절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을 익히게 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불협화음은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빛을 처음 만드셨을 때에 천사도 창조하였다고 제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실 때에 거룩한 천사와 불결한 천사도 구별하였다고 한다(참조. Civitas Dei., 11권 9장). 이 구분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넷째 날에 만들어진 하늘의 광명(창 1:14-18)은 전자의 진리의 빛과 빛을 등진 악한 천사와 구분하였다. 본성의 결함은 본성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결함이며, 하나님께 숨기거나 모호하지 않는다.   20장. 창 1:3-4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눈 뒤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다. 그것은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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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5-0301:49]]></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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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새관점학파에 대한 이해(1) 새관점학파란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1&msection=10&ssection=30]]></link>
	 		<description><![CDATA[
	 		현대 바울 신학 연구 방향은 새관점학파(School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약자 NPP)가 대세이다. 김철홍(장신대 신약학) 교수의 "현대 바울 신학 연구동향: 바울신학의 새관점을 중심으로" 논문을 요약하면서 이해를 시도한다. 김 교수의 글에서 NPP의 시작과 개념을 명료하게 제시된 것으로 평가한다.&nbsp;1. 새관점의 시작&nbsp; &nbsp;새관점의 시작은 1977년 E. P. 샌더스(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의 등장에서 비롯하였다. 샌더스는 "1세기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다"라는 것이다(Paul and Palestinian Judaism, 35-59). 그리고 유대교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율법을 지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하였다. 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이 전통적인 바울신학과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김교수가 말하는 "전통적인 바울신학"은 아마도 독일 신학(튀빙겐 학파)의 견해일 것이다. 샌더스가 율법을 신학적 부분이 아니라 사회학적 분야로 본 것도 특징이다.&nbsp;2. 새관점의 주요 주장&nbsp; 새관점의 학자는 N. T. 라이트(Wright, 1991), J. 던(Dunn, 1983)이다. 제임스 던은 유대교가 행위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고 주장하였다(p. 79). 새관점학파는 '그리스도의 의'의 주입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nbsp;&nbsp;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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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5-0222:1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구별하여 택하신 백성을 축복하신다. (민23:1-12)]]></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30&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드디어 발람은 자신이 원하는 불의의 삯을 받기 위해 모압 왕 발락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끝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응답을 받아 냈습니다. 이제 발람에게는 더 이상 거치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발락에게 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발락에게 가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기다렸던 발람이 오는 소식에 발락은 뛰어나가 거짓 선지자를 환영하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들어줄 자세가 되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 섬기는 신의 능력으로 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면 자신의 군대가 그들을 다 진멸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23장과 24장을 보면 발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4개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 4개의 계시를 넣어 주었습니다. 저주하는 계시가 아니라 축복을 하는 계시의 말씀을 발람의 입에 넣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4개의 축복의 계시에 대하여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3장 12절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세상 민족 가운데서 구별하여 선택받은 백성으로 축복하시는 지를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22장13절에서 23:26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셔서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신실하게 보호하시는 이 백성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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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4-3008:55]]></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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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초대교회는 방언으로 기도한적 없어]]></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9&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nbsp;

&nbsp;이창모 목사의 책 표지 사진
방옹자(거짓방언을 옹호하는 자)들은 방언기도가 초대 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다고 믿는다.1) 따라서 이들은 방언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 안에 풍성하게 있었으며, 그 후에도 부흥하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2) 이들은 방언기도가 있는 곳에서는 교회가 부흥하고, 방언기도를 반대하거나 없는 곳에서는 교회가 쇠퇴한다고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방언을 반대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3)
방옹자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 방언 현상이 기록된 있었던 사도행전의 본문들을 직접 살펴보면서 이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nbsp;
1. 사도행전 2:4-7절
보혜사 성령이 임하셨던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은 본토 유대인들에게는 아람어로, 천하각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들 중에는 아람어를 하지 못하는 자들이 다수 있었을 것이다)과 외국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방언)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다. 그러나 이들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만일 이때 방언으로 기도했었다면 누가가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명백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거짓방언을 홍보하고 미화하는 방옹자 김동수는 오순절 날 이후 제자들이 방언을 했지만 방언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이 사도행전에 없다는 점을 주목한다.4) 이런 이유로 그는 방언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언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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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4-2911:02]]></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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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민9:15-23,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8&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혹은 다윗처럼 ‘나는 하나님의 양입니다’라는 답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베드로와 비슷하게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19:5-6)’라고 말씀하시는 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하나님께서는‘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출애굽기19:5)’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아 ‘너는 누구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의 답으로‘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베드로전서2:9)’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답을 우리가 하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증언하신다(롬8:16)고 바울은 말한다. 이렇게 ‘너는 누구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같이 걸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갈 때나 길에서 멈출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같이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걸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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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4-2708:1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새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9)]주 안에서 받는 위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7&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든 우르시우스는 ‘위로’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대비시킬 대 나오는 것으로 선이 그것과 대비되는 악보다 더 크고 확실한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르시우스가 말하는 위로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에서가 아니라, ‘나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대상이 누구인가’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이야기함으로 자신의 삶의 위로의 바탕이 자기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붙들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다. 바울 역시 빌립보서에서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3:5-6)’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과 신념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저주받은 자임에 틀림없지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저주는 예수님께서 죄인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임을 깨달았고, 결국은 사람이 받아야 할 유일한 위로는 자기 안에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을 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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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4-2708:18]]></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성완종, 장로, 자살, 스님의 친구, 점집, 그리고 로비...]]></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6&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성완종 사건을 바라보면서... 성완종은 누구인가?성완종은 1951년 생으로 충남 서산 출신이다. 19대 국회의원(2012년)을 지낸 정치인이고, 서산장학재단을 만든 교육후원, 그리고 경남기업을 세운 기업가이다. 그리고 그는 장로였다. 방산비리로 연루된 사람도 장로였고, 교회를 자금 이동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성완종 장로는 로비 활동을 했고, 장학 사업을 했다. 그에게 수혜를 입은 사람은 대단이 많은 것 같다.성완종은 자신이 자원 외교 수사에서 자신이 집중되자 자살을 선택했다. 기자 회견에서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놀라운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두 번의 사면에서 더 이상 사면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에서 였을까? 더 이상 로비할 자금이 바닥났기 때문이었을까? 한 사람의 자살이 나라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퇴임한 대통령의 자살보다 더 큰 충격이고 소용돌이인 것 같다. 국무총리가 낙마하고 도지사, 시장, 국회의원 등 모두에게 공포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죽어가며 남긴 메모 한 장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한 사람의 자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한 번 생각한다면...첫째, 그리스도인은 자살하면 안 된다. 특히 목사, 장로, 집사 등 직분이 있는 사람은 더욱 자살하면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자살에 관대해 졌다. 그것은 자살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하루에 42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그러니 자살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에 무리를 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자살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살..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2521:3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개혁교회의 장로는 심방하며 권고하는 자]]></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5&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nbsp;

&nbsp;

&nbsp;서철원 교수 (조직신학 박사, 전 총신대 신대원장)
장로교 개혁주의란 제목이 생소한 사항이다. 첫째로 개혁주의란 용어를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다. 개혁주의란 용어는 아마도 ‘개혁주의 신행협회’라는 기독교 출판사로 인해 한국교회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양에는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개혁신학’이라는 개념과 개혁신앙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만 개혁주의란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은 확실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장로회 개혁주의란 용어도 생소하여 무슨 뜻을 전달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칼빈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고, 장로회 개혁주의라고 할 때에는 정치제도와 연관된 칼빈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잠정이해하면서 추가적으로 몇 마디 더 살피고자 한다.1. 장로제도
종교개혁은 장로제도를 생산하였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최초로 조직되었다. 그 때는 사도들이 말씀선포와 교회행정과 구제를 전담하였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교회의 구제를 잘 할 수 없게 되자 집사들을 세웠다(행 6:1-6). 집사들을 세울 때, 비록 사도들이라도도 집사를 자신들의 뜻대로 임명하지 않고 전체 교회가 선출하도록 하였다(행 6:3-6). 선출된 집사들에게 사도들은 기도하고 안수 했을 뿐이다(행6:6).
그 후에 교회가 널리 퍼지고 사방에 세워지므로 교회를 권면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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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4-2515:42]]></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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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탐심은 불의의 길로 이끈다. (민22:21-40)]]></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4&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계속해서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교훈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발람의 모습이 역사의 반복적인 사건으로 계속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nbsp;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탐심으로 가득한 발람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 안에 있는 탐욕을 감추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은 발람에게 발락이 보낸 자들과 함께 가지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발람이 듣고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께서 발락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계속 묻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이미 전해지고 가르쳐 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죄를 짓고도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셨다고 그렇게 믿고 행동을 합니다. 한국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일들 가운데 교회를 다니면서 중직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들을 우리는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전남에서 성도들이 70-80 여명 되는 교회목사가 보이스 피싱에 연관된 돈을 찾아주는 중간 역할을 맡아 수수료 명목의 돈을 받아 구속이 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는 여전히 돈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받는 생활비가 부족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하는 모습 속에서 만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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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4-2315:2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벧전2:9-10, 너는 누구냐?]]></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2&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후 2세기경의 변증서인 ‘디오게네투스의 편지’라는 글에는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과의 차이는 국적의 문제도 아니고 언어나 문화의 차이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해서 그 곳에 따로 사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주 괴팍한 삶을 고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나라인 고향에 살면서도 행동을 지켜보면 나그네처럼 행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운명이지만, 육신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땅에 살아가면서도 시민권은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어진 법을 준수하지만, 법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그들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정죄를 당하지만 도리어 죽음같은 고난 때문에 삶에 더욱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부요케하며, 자신들을 향한 저주를 축복으로 갚으며, 핍박을 친절로 되갚는다...’ 이런 삶의 방식이 가능한 것은 핍박이 극심한 그 때, 예수님을 따랐던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이끌어왔음을 입증해 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디오게네투스의 편지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원리와는 다른 삶을 산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정죄를 당하지만 고난 때문에 도리어 활력이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2020:35]]></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이야기 톡]다윗의 역경의 삶에서 찬양, 시편 23편]]></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1&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다윗은 시 23편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인 자신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다윗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쉴만한 물가와 푸른 풀밭 위에서 목가적으로 풀을 뜯으며 여유로운 삶을 사는 양의 모습은 아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양이라고 생각한 다윗의 삶을 살펴보면, 이새의 여러 아들을 보고 난 후에 다른 아들은 없느냐고 묻는 선지자 사무엘에게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사무엘 상16:11)’라고 말했던 것처럼 다윗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들이었던 것 같고, 이새의 아들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 상16:7)’라고 말하셨던 것처럼 용모와 키에서 그의 형제들보다 떨어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사무엘 상18:7)’라는 칭송을 받으며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시기심과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하고, 심지어 자신을 위해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사무엘상 19:9-10)’할 정도로 다윗은 그의 삶에서 여러 가지의 위기를 맞는다. 그런 위기 때마다 다윗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위기를 모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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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2020:3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목사들의 범죄 뉴스에서 한국 교회의 존망을 성도에게 걸어야 하는 비참한 마음으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20&msection=1&ssection=10]]></link>
	 		<description><![CDATA[
	 		  한국 대형교회에서 조용하거나 조화를 이루며 진행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는 대형교회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두 신문 기사에서 이런 안위도 할 수 없게 했다. 그 기사는 중소형 교회 목사들의 도둑(자전거)과 사기(보이스피싱)의 일탈 행위였다. 결국 한국 교회 목사는 위아래 구분 없이 모두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여실하게 폭로한 것이었다.   목사로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뼈저린 통감을 먼저 한다. 대형교회 목사가 그랬을 때에는 통감이 아니라 핑계를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소형 교회 목사의 행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패와 병폐에 대한 핑계를 할 수 없다. 결국 한국 교회의 부패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가 부패하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한 공동체의 문제는 지도자의 문제이다. 세계 경제가 부실하다고 떠들썩하는데 남미의 한 대통령이 기사화되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정평이 낳고, 우루과이는 선진국은 아니지만 가장 행복한 나라였을 것이다. 한 지도자의 헌신은 공동체의 부와 빈에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가 공감하고 공유하고 공존하는 조화의 세상이 펼쳐진다. 세속 국가의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을 거룩한 교회의 지도자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충격이다.   목사가 부자여도 타락하고 가난해도 타락할 것이다(잠 30:8).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이상적인 상태가 있을 수 없다. 결국은 부한 자는 부함으로 타락을 염려해야 하고, 가난한 자는  가난함으로 타락을 염려해야 한다. 대형교회의 부한 목사..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902:2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50) 11권 14-17장. 마귀는 피조물 중에서 하급에 위치한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9&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11권 14장.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요 8:44)는 쉬운 말씀이 아니다. 마귀가 단순하게 진리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리에 서지 않은 것은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유사한 어법은 내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이 있다. 기도하여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심이 내가 부르짖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5장.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본성에 의한 행동일 때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창조 때부터 범죄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시작한 때부터 범죄하였다고 받아드려야 한다. 욥 40:19, 시 104:26은 마치 마귀들이 천사들의 비웃음거리로 창조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의 목적이 비웃음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미천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 만물은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 하나님으로 창조된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다. 천사는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존귀한 피조물(합리적 피조물)이다.  16장.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것보다 우선한다. 생식력, 의욕, 충동 등으로 생명의 등급을 나눌 수 있다. 나무보다 동물이 위에 있고, 가축보다 사람이 위에 있다. 불멸하는 천사들은 죽음이 있는 인간들보다 높다(sicut angeli hominibus). 그러나 가치판단은 상황적인 면도 있다. 무생물이지만 생물보다 더 높은..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901:58]]></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김세윤의 [신학세계] 비판적 읽기(1) 소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7&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김세윤, 『김세윤 교수의 신학세계』, 이레서원, 2009.


“김세윤 교수의 신학 세계를 담은 책으로 지난 10년 동안 평신도들을 위해 한 강연들을 글로 옮긴 것, 교계 신문이나 월간지에 게재되었던 인터뷰 기사 등의 글들을 모았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저자는 싱가폴, 영국, 독일 등 세계 각지에서 공부하였으며 교수로서 사역하였다. 저자의 다양한 이력과 경험을 통해 신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 [예스24 제공]&nbsp; 김세윤 교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싱가포르 Discipleship Training Center, 영국 런던대학교,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다시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F. F. Bruce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마쳤다. 그 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했고, 독일 홈볼트 연구 교수, 싱가포르와 미국 칼빈 신학교, 풀러 신학교,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했다. 국내에서는 아세아 연합 신학대학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 교회에 대한 소명을 따라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학 박사과정(D. Min)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nbsp;&nbsp; 저서로는, 『The Origin of Paul's Gospel』(Tubingen : Mohr-Siebeck, 1981: 제2수정판 1984 ; Grand Rapids : Eerdmans, 1982)과 한..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712:0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피로연은 피로를 풀어주는 잔치? 성기지 운영위원]]></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6&msection=6&ssection=19]]></link>
	 		<description><![CDATA[
	 		‘피로연’은 기쁜 일이 있을 때 음식을 차리고 손님을 청하여 즐기는 잔치이다. 꼭 혼례식 때만 쓰는 
말이 아니라, ‘회갑 피로연’, ‘생일 피로연’ 등으로 널리 쓸 수 있다.&nbsp;피로연은 피로를 풀어주는 잔치?    성기지 운영위원봄빛 짙어지고 봄꽃 흐드러지게 피면서 예식장들은 신이 났다. 요즘엔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다들 ‘결혼’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한자말은 ‘혼인’이다. 예부터 ‘혼인식’이나 ‘혼례식’이라고 하였지, 
‘결혼식’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에서 ‘혼인’과 ‘결혼’은 모두 표준말이다.혼인과 같은 경사스러운 일에 초대하는 
편지는 ‘초청장’이라 하지 않고 따로 ‘청첩장’이라고 말한다. 혼인을 알리는 청첩장에 ‘화혼’이라고 쓰인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화혼’이라는 말이 혼인을 신부 입장에서 따로 부르는 말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화혼은 예전에 혼인을 청첩장에 한자로 쓸 때 
멋스럽게 쓰느라 따로 만들어 쓰던 말이었다. ‘혼인’이나 ‘결혼’, ‘화혼’은 모두 같은 말이다.혼례식이 끝나고 갖는 음식 잔치를 
‘피로연’이라고 한다. ‘피로연’은 기쁜 일이 있을 때 음식을 차리고 손님을 청하여 즐기는 잔치이다. 꼭 혼례식 때만 쓰는 말이 아니라, ‘회갑 
피로연’, ‘생일 피로연’ 등으로 널리 쓸 수 있다. 자칫 ‘피로연’을 혼인 당사자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잔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때의 
‘피로’는 “몸이 지치고 힘들다.”는 ‘피로(疲勞)’가 아니라, “일반에게 널리..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708:20]]></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불의의 삯을 위해 가지 말라(민22:1-20)]]></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4&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신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는 방법 가운데 성경의 인물을 들어 그들의 행사를 주의 하여 보라고 하시는 말씀이 여러 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훌륭한 선진들의 이름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들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시는 이유는 결국 믿음의 백성들에게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정면교사와 반면교사로 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끝까지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해서 언제나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자주 되새겨 말해야 자신들의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능성마저 여전히 부패한 죄로 인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새롭게 하여 주시는 전적인 은혜만이 사람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이 은혜가 각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은 말씀을 계속 들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주, 반복학습으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상기 시켜주시는 것입니다.&nbsp;오늘 우리는 발람이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것과 당장이라도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울 것입니다. 그전에 발람이 왜 성경에 등장하게 되는지 그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nbsp;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거의 4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여전히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617:1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눅3:15-17,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의미]]></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3&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Fact)이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해석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회상할 수 있고, 또 우리와 같이 하심을 알 수 있었다. 이 땅에 가장 큰 믿음을 갖고 세상에 오셨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하여 기도하셨고, 그 십자가에서 다른 한편의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23:42)’라고 말했을 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23:4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성전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질 때에(누가복음23:44-45),‘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23:46)’라고 말씀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로마서1:4)’셨고,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요한복음1:12)’주신다는 약속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안에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와 같이하신다. 몇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믿음’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세상의 안목과는 다른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즉..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322:5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 하이델베르크 묵상(6)]인생의 역경 중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2&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그리스도의 소유된 나는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죗값을 다 치루셨고, 나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셨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성부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지‘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이 이루도록(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문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사도신경에서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했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7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써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심을 믿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섭리는 창조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표현하는 말이다. 
야곱이 죽고 난 후에 요셉에게 한 해코지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창세기50:17)’는 야곱의 유언을 말하면서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세기50:17)’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요셉의 종이라고 엎드리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이때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322:5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조경민 집사, 등대성결교회 찬양집회 인도하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1&msection=1&ssection=1]]></link>
	 		<description><![CDATA[
	 		에벤에셀 대표 조경민 집사는 전북 임실에 있는 등대성결교회(담임 신현준 전도사)에서 개최한 "2015년 풍년기원 새생명 봄맞이 대잔치"에서 찬양사역을 펼쳤다.&lt;사진: 김성구 박사 - 세계독서치료학회 회장 &gt;조경민 집사는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찬양과 작곡, 작사, 시 등 다양한 문인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교회의 교가를 작곡, 작사하여 교회의 찬송을 작성하는 등 다양한 교회 사역을 펼치고 있다. 신앙간증, 찬양집회, 사진촬영, 영상촬영, 시인 발굴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고 있는 유력한 인재이다.에벤에셀 스튜디오 조경민 대표(집사)전화: 062-269-4644주소: 광주시 북구 두암동 574-2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321:16]]></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으랏차차! 나눔 봉사단이 '정겨운뜰안'을 방문하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10&msection=5&ssection=16]]></link>
	 		<description><![CDATA[
	 		함평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센터장 김기영)는 함평군에 거주하는 결혼이민자를 모아 "으라차차차봉사단"을 결성하여 다양한 문화 지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nbsp;지역의&nbsp; 노인요양원을 순회하면서 문화 공연을 펼친다. 각 나라의 특징적인 무용과 또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익힌 춤과 노래 등으로 단조로운 요양원의 삶에 활력을 제공한다. 각 나라의 특징적인 전통의상,&nbsp; 다양하게 연출한 의복도 큰 흥미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노인의 공동체에 젊은 여인네들의 방문은 그 자체로 활력이 넘친다.금번에는 정겨운뜰안(원장 박초하)을 방문하여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즐거움과 싱그러움을 제공했다. 노인들의 눈에는 외국인이 아니라 젊은 아낙네들이 경쾌한 음악으로 춤과 노래를 들려줌으로 어울림을 갖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번 행사를 유치하여 함께한 배인석 목사는 함평군이 좋은 사업을 하고 있고 시설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활력이 되었다고 기뻐했다. 정겨운뜰안은 배인석 목사가 사모님과 함께 노인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기 위해서 수 년 동안 기도하며&nbsp;조성한 천국 일번지이다. 박초하 원장은 16년의 간호사 경력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돌봄을 실시하고 있다. 배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기 때문에 입소한 노인들이 평안 중에 거주하고 있다고 사역의 의미를 말했다. 다양한 연계 활동으로 노인들에게 활력과 유익을 제공하며 돌봄을 펼치고 있다. &lt;정겨운뜰안 시설 내부: 황토와 목재로 친환경으로 조성된 건축물과 내부가 특징이다.&gt;&nbsp;&nbsp;&nbsp;&n..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320:5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삼국시대"라고 말할 때에 오는 난점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9&msection=6&ssection=18]]></link>
	 		<description><![CDATA[
	 		삼국시대라고 말하는 개념에 있는 난점1) 가야를 포함하고 있지 않고,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암묵적으로 따르게 된다.2) 삼국시대를 말하면 -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일조하게 된다. 동북공정에서 주요 목표는 고구려가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한 지류였다. 삼국시대로 보면 통일신라를 한 민족 공동체의 시작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한 민족이 형성되는 시기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3) 한민족의 시작을 고조선으로 보아야 한다. 고조선이 합법적인 체계를 갖는 국가로 보아야 한다. 4)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란.. 고구려가 중국 역사인가? 한국의 역사인가? 한사군에 대한 바른 역사관을 정립해야 한다. 동북공정과 식민사관 그리고 우리의 바른 역사... 민족은 "집단귀속 의식"이 있어야 한다.윤내현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강연 에서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215:3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대마중앙교회 화재로 전소되어 도움이 필요하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8&msection=1&ssection=3]]></link>
	 		<description><![CDATA[
	 		2015년 4월 8일 수요일 오후에 대마중앙교회(조문평 목사 시무)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로 인명 피해는 없지만 예배당이 전소되었다. 화재로 예배당 내,외부는 화재의 처참한 몰골만 있을 뿐이다. 조문평 목사는 인명 피해와 주변에 피해가 없는 것으로 감사하다고 애써 위안을 한다. 그렇지만 예배당을 신축해야 하는등 앞으로 일이 심각하다. 많은 기도와 관심 후원을 부탁합니다.후원문의: 조문평 목사전남 영광군 대마면 동삼로 528&nbsp;대마중앙교회061)352-3737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1013:2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20:19-29)]]></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7&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우리가 읽은 요20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풍성한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마포를 벗고 대제사장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 또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부활의 날에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우리는 들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기쁨을 충만히 주시고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는 만져보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상처 난 자신의 몸을 보여주시는 것과 의심 많은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시는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아주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습니다.&nbsp;먼저 분문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앞에 나오는 17절 말씀가운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한 일을 우리는 읽을 수가 있습니다. 부활한 자신의 몸을 만지려고 하는 마리아에게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새 번역은 “나를 붙잡지 말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 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을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고 하시고 있는가? 라는 궁금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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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900:13]]></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궁극적 이유]]></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5&msection=2&ssection=7]]></link>
	 		<description><![CDATA[
	 		부활하신 예수님은 숨어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고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주님의 실체적인 부활을 보고 기쁨이 충만하였다.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잘 모른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단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낸다.”(요20:21)라고 하시면서 숨을 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nbsp;우리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숨어 있는 그들 앞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부활사건을 통해 부활이 주는 의미와 기쁨을 말할 수 있지만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는 목적은 그 의도가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자들로 세상에 보내시기 위함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자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복음 선포를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을 보내고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성령을 보내시는 목적이 분명하다. 오직 복음 선포를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을 지금 당장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나,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 보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900:0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 고전15:12-19, 회상 그리고 같이하심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4&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역사는 사건을 따라 흘러간다. 누가 태어났다든지 아니면 누가 무엇을 했다든지의 역사적인 사실이 역사에 모두 기록되지 않는 이유는 그 사건들이 비록 역사성이 있는 사건일지라도 역사를 이룰만한 의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역사적 의미가 중요하기는 해도 역사적 사실성이 없는 경우는 그 의미 역시 별로 길게 가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를 이루는 것은 어떤 사건이 갖는 의미가 ‘가치’를 가질 때 가능하다. 여기서 문제는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에 따라 역사를 이해하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당시 로마인들에 의해 로마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흔하게 자행되었던 로마의 형벌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이야기가 2천년 동안 이어오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가지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었고, 그 사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자들의 삶의 바탕은 예수님이 되신다. 이런 신앙고백을 사도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11:36)’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멈추는 곳곳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온다는 깨닫고 이렇게 노래할 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620:5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르크(7)] 전능자의 위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3&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실망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유일한 위안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시작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든 우르시우스는 가 말하는 위로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4-5)’라고 말했던 다윗처럼 생사의 갈림길 같은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위로는 ‘나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밖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참된 위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임을 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보혈로 나의 죗값을 완전히 치루고 나를 죄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은 나는 ’성부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지‘않을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이 이루도록(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 만드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에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나를 보호하시며 나의 구원을 이루시는 ’전능하사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620:48]]></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이로비에서 온 편지]]></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2&msection=1&ssection=9]]></link>
	 		<description><![CDATA[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케냐 CTI목회신학원에서 김좌명, 이선화 선교사가 문안합니다. 평안의 인사를 학교와 직원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저희를 위해 날마다 헌신하고 협력하고 기도하는 교회와 가정들에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케냐는 나이로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긴 가뭄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nbsp;이곳저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토목 공사현장도 있습니다. 몇해 전 40Km 구간을&nbsp;6-8차선 고속도로 공사를 중국의 도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400Km의 고속철도 공사가 한창입니다. 국민들은 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을 가식적으로 볼 수 있어 미래의 희망과 꿈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술력 협상이나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체 모든기술과&nbsp;자재를 수입하여 케냐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케냐의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중국인들이 대신하고 있어, 가시적인 희망의 내면에는&nbsp;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공허감과 빈부의 차이가 심각합니다. G2로 성장하는 중국의 위력은 케냐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의 성장에 견줄 수 있는 한국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부탁합니다. 저희 CTI는 1월 2째주부터 Bible Story telling으로부터 시작해서 올 첫 학기와 확장 프로그램(Extension Program Class)이&nbsp;4개(Mwingi, Mbooni, Ruai, Loiotoickot) 지역에서 동시에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강사로 협력을 하게 된 이종호 선교사님과 케냐인으로 싱가폴(FEBC)에..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620:44]]></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이한섭,『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고려대 출판부, 984쪽. 7만5천원, 2014년)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1&msection=9&ssection=28]]></link>
	 		<description><![CDATA[
	 		한국(韓國)은 한자(韓字)를 포기하고 한글만을 사용하니 뜻(訓)을 잃고, 일본이 만들어 놓은 어휘를(3634자) 따라서 사용하니 지식에 혼동(混同)이 증가한다. 한국이 과거를 알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 - 고경태 -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바른 역사관과 학문관이 수립되어야 한다.이한섭,『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고려대 출판부, 984쪽. 7만5천원, 2014년) 예)대통령, 신문, 민주주의, 자유, 사회, 철학, 검사, 과학, 문학, 미술, 간첩, 국민의례..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620:1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기독교강요(13) 성경의 가신성(자증)]]></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800&msection=10&ssection=44]]></link>
	 		<description><![CDATA[
	 		 칼빈은 인간 이성으로도 성경의 신뢰성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강요 I권 7장에서 성경은 성령의 내적 감동으로 권위가 효력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8장에서는 성경이 인간 이성으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 제시한다.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판단이나 교회의 승인에 있지 않고 성경 자체에 있다(성경의 가신성(可信性), 自證, autopistia, authenticatio in se). 성경에는 하나님 지혜의 경륜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구성하고 있다. 또한 가르침이 천상적 성격(天上的 性格)이어서 땅의 어떤 냄새가 없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조화로워 스스로 증거하며 권위를 취한다. 성경은 문체(文體)의 우아함 보다 주제의 위대함으로 독자의 마음을 끈다. 숭고한 하늘나라의 비밀들(sublinia regni coelestis mysteria)을 소박하고 겸손한 문자로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다. 성경은 꾸밈없고 단순하지만 어떤 웅변보다 감동을 주어, 독자가 성경을 존경하며 진리의 말씀으로 확신하게 한다. 성경만큼 감동을 주는 문장은 없다. 훌륭한 문장가들의 글도 매혹적이지만, 깊은 감동과 마음에 찔림, 골수에 미치는 감동은 성경에서만 느낄 수 있다. 성경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성경의 원저자auctor primarius는 성령 하나님Spitius Sanctus이시다. Inst., I, 8, 1.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auctores secundarii, 이차저자) 중에는 탁월한 문필가도 있지만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501:2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49) 11권 10-13. 유일한 선으로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9&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11권 10장.  선(善, bonum), 홀로 단순하며 홀로 불변한 선은 하나님이시다. 선에서 선을 창조하였는데, 창조된 선은 출생한 것은 아니며(non genita) 단순하지 않으며 변한다. 그런데 단순한 선에서 나신 이는 낳은 이와 같다. 우리는 둘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른다. 양자와 함께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다르고, 아들과도 다르다(alius). 댜른 분(alius, another)과 다른 것(aliud, another thing)는 구분해야 한다. 즉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게 단순한 선이시며 불변하시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trinitas unus est Deus). 삼위라고 해도 단순한 것이다. 사벨리안 이단은 위격에 실체가 없고 명칭만 있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이 있고 동일본체로 존재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갖고 있지만, 아들은 아니다(Pater habet Filium, nec tamen ipse est Filius). 다만 위격과 관계에 대해서는 예외를 둔다(excepto quod relatiue quaeque persona ad alteram dicitur).   삼위가 단순하여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본체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속성과 본체가 같은 경우는 없다. 인간도 영혼과 육체에서 영혼과 육체가 가변적이지만, 부활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다. 부활체가 변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는 아니다. 인간은 영생에서도 실체와 속성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성과 본체가 동일하다.  ..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423:1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구속사 강단]참 선지자로 오셔서 생명의 길을 보이심 (마7:15-29)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8&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단원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저버리고 단지 문자적으로 계명을 붙잡고 살면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여기고 종교적 위선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계명의 전체적인 뜻이 시행되지 않고 단지 종교적 열정에 빠져 거짓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구원의 받는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nbsp;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하나의 민족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몇 가지 주신 제도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셨고, 제사 및 의식과 절기 그리고 성전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선지자들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이끌고 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주된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의 생각과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불순종의 길로 갈 때 참 선지자의 말을 듣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언제나 미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항상 거짓 선..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310:4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세월아~~]]></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7&msection=8&ssection=25]]></link>
	 		<description><![CDATA[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223:31]]></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성(性)스러운 성(聖)직자?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6&msection=8&ssection=25]]></link>
	 		<description><![CDATA[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안전행정위원회 인천남동갑)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받아 보도자료를 발표했다.&nbsp;최근 5년간 목사, 승려 등 성직자 성범죄자는 ‘09년 80명, ’10년 108명, ‘11년 93명, ’12년 87명, ‘13년 96명으로 5년간 총 464명에 이르는 등 증가세 있는 것으로 발표했다.&nbsp;지역별로는 경기 99건, 서울 71건, 부산 40건, 경북 23건 등 인구가 많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nbsp;성직자 성범죄는 전문직종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최근 5년간 전문직종 성범죄 현황을 살펴보면 종교인이 46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의사 379명, 예술인 223명, 교수 119명, 언론인 59명, 변호사 20명 순이었다.&nbsp;특히 성직자 성범죄는 최근 논란이 된 성범죄 교사보다도 배 이상 많은 수준어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성범죄 관련 비위교사는 224명인데 성직자 성범죄자는 이보다 두 배 이상 많다. 교육부는 성범죄를 저지른 교사가 교단에 서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최근 성범죄로 형사처벌을 받은 교사 및 교수 등은 영구퇴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반면, 성도를 대상으로 교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성직자의 성범죄 문제는 교단 자체적으로 풀 수 밖에 없고, 성범죄 사실이 은폐되거나 상황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공론화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직자 성범죄를 근절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박남춘 의원은..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4-0223:29]]></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하나님의 도성 읽기(48) 11권 8-9. 6일 창조에서 창조된 천사  ]]></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5&msection=9&ssection=27]]></link>
	 		<description><![CDATA[
	 		
&nbsp; 11권 8장. 창조주 하나님께서 7일째에 ‘안식’하시며 거룩하게 하셨다(창 2: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쉽게 구절로 생각하지 않도록 권고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말씀은 들을 수 있거나 순간이 아니며, 지성적이고 연속되는 것이다(qui dixit et facta sunt uerbo intellegibili et sempiterno(영역. spiritual and eternal), non sonabili et temporali). ‘안식’이라는 단어에서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수고를 느끼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의 안식을 의미한다(히 4:4-11).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창조의 집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극장이 갈채를 보낸다”는 표현으로, 극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극장’을 칼빈이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를 무대로 제시한 것으로 연결할 수 있겠다(Inst., I,5,14). 창 2:2에서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 백성들이 안식하며 즐거워함을 의미한다. 
9장.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de sanctae ciuitatis)을 말할 때 천사의 기원에 대해서 제시하는 것을 시도한다. 그것은 천사가 거룩한 도성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천사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풍성한 근거한 있다. &nbsp; 먼저 세계 창조에서 천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명확한 제시가..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3-3021:12]]></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예그리나복지센터 장애인등급제 폐지를 위한 농성에 참여하다]]></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4&msection=5&ssection=13]]></link>
	 		<description><![CDATA[
	 		예그리나장애인복지센터(김용근 센터장)는 광화문 장애인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 무기한 농성장에 참가하여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익의 장에 동참했다. 장애인 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페지 운동은 2013년 8월부터 무기한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lt; 오른쪽 김용근 센터장과 함께 참석한 회원들&gt;장애인등급제를 왜 폐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인간을 등급으로 판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장애인 등급은 인권 문제와 행정편의적 발상의 전형이다. 정부는 등급제를 하향 조정하면서 경제적 지원을 축소하는 행태도 가져 왔다. 장애인이 스스로 정보를 취득하여 권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와 기관에서 직접 살펴서 결정해 주어야 하는데, 장애인 직접 병원에서 등급을 받으면 그것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현재 구조를 변화가 필요하다. 장애인의 인권, 생활, 경제 모든 면에서 심각한 저해 요인이 있다.이러한 부당한 요소는 장애인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은 무기한 천막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1,000일이 되어도 정부는 미동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의식도 미동이 없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의 길로 가는 것은 연금문제나 의료보험 보다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의식 개선이 시급하다.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해야 하고 보호되어야 한다.&nbsp;22일(일)에는 광주에 있는 예그리나복지센터와 회원들이 상경하여 농성장을 지켰다. 전국 장애인들이 함께 농성을 진행하지 않도록 빠른 장애인 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철폐되..
	 		]]>
	 		</description>
	 		<dc:date><![CDATA[2015-03-3015:47]]></dc:date>
	 		<dc:subject/>
	 	</item>
	 	
		<item>
			<title><![CDATA[[나누는 이야기]막14:32-42,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3&msection=2&ssection=5]]></link>
	 		<description><![CDATA[
	 		
1.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마가복음8:31)’셨을 때‘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16:22)’라고 항변하는(예수님을 꾸짖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8:33)’라고 꾸짖으셨는 데, 그것은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고 사람의 일, 즉 ‘이 모든 것’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난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라고 기도하신다. 주님은 여기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심으로‘이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신다. 그리고 고난의 길로 가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로마서5:8)’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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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3-3010: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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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1세기에서 본 하이델베르크(6)]이단에 당하는 우리의 자화상]]></title>
	 		<link><![CDATA[www.ctimes.or.kr/news/view.asp?idx=792&msection=1&ssection=2]]></link>
	 		<description><![CDATA[
	 		
기독교 방송국에서 만든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레포트를 보고 있다. 그리고 과거 신천지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활동하다 신천지를 탈퇴하고 목사가 된 분의 간증과 신천지에 대한 강의를 동영상등을 보았다. 충격적인 것은 신천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전도하러 가기 전에 기성 교인들을 향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를 외치는 모습이었다. 참으로 허술하게 만들어 놓은 거짓말에 속아 신천지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들은(기성 교회의 교인들은) 우리 밥이다’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충격적인 사실은 신천지에서는 자신들이 목표로 삼은 사람들을 신천지로 데려가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목표로 삼은 사람의 취향, 성격,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등등을 사전에 조사해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했듯이 진리를 왜곡하기 위한 ‘맞춤질문’을 던지며 유혹한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의 삶 가운데서 느끼는 아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음을 실감하게 했다. 만약 교회사 주변의 지체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아픔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루터가 교리문답을 만들었을 때 던진 질문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고민한다면 신천지 같은 이단을 충분히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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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CDATA[2015-03-3009:57]]></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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